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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란 ②] 청계천 8가 ‘악바리’ 노점상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최옥란의 삶과 죽음 ②
등록일 [ 2019년11월01일 16시41분 ]

▷ 1부 : 이르게 온 미래, 최옥란

 

장애인의 자립을 위한 노점상운동, 그리고 청계천 노점상 최옥란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93년 사랑하는 아들을 얻었지만 98년 이혼에 이르고, 양육권은 경제적인 능력이 있고 상대적으로 경증의 장애를 가진 남편과 시부모님의 손에 갔다. 99년 면접교섭권을 확보하기 위한 재판을 진행해 약간의 면접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최옥란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들 준호와 함께 살고 싶다는 것, 이를 위해 돈을 모으겠다는 것은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아들 준호와 최옥란 열사. 연도 미상. 사진제공 빈곤사회연대

 

95년 3월, 서초구청 앞에서 분신으로 항거한 노점상 최정환은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복수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최정환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알려진 장애인의 위태로운 생존과 노점상에 대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단속의 현실은 노점상운동과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연다. 전국노점상연합회(아래 전노련)와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는 장애인 빈민의 현실을 공유하고, 연합기구인 장애인자립생활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를 결성한다. 전장협은 95년 5월 노점분과를 개설한다. 노점분과는 “전국의 노점장애인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고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전장협의 조직강화를 목표로 활동한다”1)고 목표를 밝히고 있다.

 

자립을 위해선 돈을 벌어야 했고, 돈을 벌기 위해선 일자리가 필요했다. 활발하던 장애인 대중운동은 92년 울림터 해산을 거치며 주춤했고,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는 민중운동의 침체를 가져왔다. 장애인운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동은 침체되어 있었고, 청년이었던 활동가들의 생계는 막막했다. 장애인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기도 했지만 장애인이 고용된 회사는 적었다.

 

노점을 통해 자립하고, 함께 싸울 진지를 만들어보자는 새로운 전망이 장애인운동에 던져졌다. 박흥수는 “장애인 오십 명만 제대로 모여서 한군데서 생계를 해결하고 매일 같이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으면 이게 바로 장애인혁명을 불러올 거”(조성남 인터뷰)라고 희망했다. 김종환, 조성남을 비롯한 활동가들은 생계를 위해, 그리고 다른 장애인과 함께 살기 위해 노점상이 되었다. 매일 매일 거리에서 자리를 지키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게 앞 막지 마라’하는 상가주인이 있었고, 단속반 있었고. 그리고 떴다방(한자리에 있지 않고 주말이나 장날 등 특정 시기에만 문을 여는 이동형 노점). 주말에 떴다방이 장사하는 자리를 우리가 상시적으로 장사를 하겠다고 자리를 깔아버린 거니까. 가장 다툼이 심했던 건 상가주인들이었어요. 그다음에 뭐 상가주인의 민원에 의해서 나오는 그 친구들(단속반). 그리고 이제 토요일 일요일은 그 친구들(떴다방)하고 싸워야 하고. 거의 날마다 싸워야 했죠.” (조성남)

 

95년 4월, 장자추의 첫 번째 노점 자리는 청계8가 삼일아파트 13동 앞이었다. 95년 동서울 터미널 앞에 자리를 만들고, 8월에는 동대문 경동시장에 2자리, 삼일아파트 20동 앞에 20자리를 확보해 노점상을 운영했다. 한 자리, 한 자리에 삶이 담겼다. 중증장애를 가지고 앵벌이를 하던 이들에게 괜히 땅바닥 기지 말고 같이 좀 먹고 살아보자 얘기할 수 있었다. 장애가 중증인 회원들의 장사 물품을 펴고 걷는 것은 주변 다른 노점상들이 힘 모아 해결했다. 처음엔 적대적 관계였던 떳다방도 나중엔 회원으로 가입했다.

 

“거기에 자리가 스무 개는 넘게 있었을 거에요. 저희가 한 개 지부를 형성했었으니까. 중구 노점상연합회 1지부였거든요 저희가. 그다음에 뭐 2지부 3지부 거기에 떴다방들까지 나중에 흡수하면서 4지부까지 생기고 마장동지부 있고 이랬는데. 원래 떴다방으로 하던 사람들도 22동부터 평일장사들을 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1년 정도 싸우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주말에 장사하다가 눌러앉아 버린 거죠.” (조성남)

 

98년 이혼 후 최옥란은 노점을 시작했다. 이미 다른 노점상들이 함께 싸워 자리를 만들어낸 뒤라 유동인구가 많은 13동에서 20동 사이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시장 끝에 위치한 24동 앞에서 최옥란은 노점을 시작했다. 주말에는 떴다방이 들어와 장사할 흥이 났지만 평일엔 텅 빈 신생시장이었다. 장사가 잘 안됐다. ‘이걸로는 안 된다’던 최옥란은 주중에는 주차장, 주말에는 떴다방 트럭이 들어오는 13동 앞 차도에 좌판을 깔았다. 매일 이어질 단속과 싸움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단속에 처한 최옥란을 주변 회원들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최옥란의 자리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탰다. 여러 번 자리를 옮기던 최옥란은 17동 앞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청계천은 복원공사를 앞두고 있어 철거와 이전 논의가 오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언제 쫓겨날지 몰라 모두 불안했고, 서울시의 제안대로 동대문으로 가야 한다는 사람들과 그러면 안 된다는 사람들로 의견이 갈라졌다. 장자추를 함께 구성한 전노련과 전장협은 투쟁 방식에 대한 의견이 갈렸다. 최옥란은 노점상을 하는 동안 지역 투쟁현안과 연대에는 관심이 없고 소홀했다. 일주일에 하루는 장사를 못 하고 연대집회니, 구청이나 시청을 찾아다니며 투쟁을 해야 했던 다른 노점상들에게 이런 최옥란의 행동은 얄미운 일이었다.

 

“악바리였어요. 노점할 때 옥란은. 내가 옥란을 처음 봤을 때 옥란은 굉장히 여린 소녀같은, 여리게 보이는 친구였는데. 노점하면서부터는 굉장히 독기가 올라있다고 그럴까요. 자기 생활이 그렇게 (어렵게) 몰리니까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시기가 가장 옥란에게 있어서 마지막 발악이었다고 봐요. 막판에 정말 강하게. 그래서 주위사람들 잘 못 어울리고 이랬던 게 있었던 거 같아요.” (조성남)

 

노점분과는 빈민특위로의 발전을 계획하였으나 현실적 어려움으로 달성하지 못했다. 전장협은 노점분과를 98년 자립사업부로 개편한다. 이후 전장협이 한국장애인연맹(DPI)과 통합하면서 자립사업부는 사실상 해체하게 된다. 노점분과, 자립사업부가 꿈꾸었던 장애빈민 대중의 조직화의 꿈은 유보된다.

 

노점상 최옥란은 생존을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는 사치였다. 그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막다른 골목에 있었던 그녀의 분투는 더 나은 상황을 열어주지 않았다. 노점상으로 생활하는 것이 힘에 부치는 나날이 이어진다. 2000년 10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되며 그녀는 노점상을 포기하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최옥란 열사. 연도 미상. 사진제공 빈곤사회연대
 

기초생활보장제도 시행과 최저생계비, “이대로는 못 살겠다”

 

“자기가 최저생계비 문제를 제기하겠다. 이걸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 자기가 이걸 하게끔 도와달라… 이렇게 만난 게 처음이야.” (유의선)

 

2001년, 최옥란은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고, 경찰의 저지선을 밀어붙이는 장애인운동의 현장으로 돌아왔다. 당시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뒤 최옥란은 너무 낮은 최저생계비의 문제를 주변 동료들에게 호소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함께 싸워야 한다고 여러 동료들에게 이야기했지만 장애인 이동권을 비롯해 첨예한 현안에 쫓기던 장애인 운동은 이 문제를 직접 다루기엔 어려웠다. 2001년 6월, 용산구 갈월동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서 당시 서울지역실업운동연대 사무국장이었던 유의선과 최옥란이 만났다.

 

IMF 이후 대규모로 발생한 실업은 새로운 빈곤 문제를 운동의 과제로 대두시켰다. 정부 역시 이에 대응하기 위해 99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아래 기초법)을 제정했다. 이전 생활보호법과 달리 기초생활보장법은 나이나 장애유무와 무관하게 수급자격을 부여했고, ‘최저생계비’를 국가가 책임지고 전 국민이 보장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생활수준이라고 공표했다. 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은 빈곤층에 대한 국가책임을 선언한 최초의 법안이었다. 사회권을 법률에 명시한 최초의 복지제도로 평가받으며 김대중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지금도 호명된다.

 

당시 실업운동 단체들의 서울지역 연대조직이었던 서울지역실업운동연대는 일자리 문제와 더불어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비롯한 복지제도의 문제에 주목하고 있었다. 실업자상담센터를 운영하며 실업자의 일자리 연계를 하기도 했지만 민간단체로 연결되는 일자리의 종류나 질엔 한계가 있었다. 2000년 10월 시행된 기초생활보장제도에 기대를 걸었지만 탈락했다는 이야기를 쉬이 듣거나, 너무 낮은 최저생계비 때문에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실업자상담센터에서 상담을 해보니까 일자리문제이거나 복지의 문제인데 두 개 다가 미흡한 상황인 거지. (그때)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가 서울지역실업운동연대의 참가단체였고, 수급자문제는 장애인이동권연대에서 하기 어려우니 같이 움직여 달라고 했었던 거지. 그러면 기초법 시행 1년을 맞아서 옥란언니 사례를 중심으로 최저생계비 현실화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지).” (유의선)

 

‘해보자’는 의기투합 후 농성에 들어가는 데 6개월이 걸렸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된 이래 처음으로 수급 당사자가 제도의 문제를 제기하는 싸움이었다. 주변 단체들에 농성에 함께 하자고 요청하고, 참가를 조직했다. 최옥란은 무기한 단식농성을 비롯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싸우고 싶다며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단체나 활동은 미약한 수준이었고, 추운 겨울이라 중증장애를 갖고 있는 최옥란의 건강도 걱정되었다. 취지에 동의하지만 농성을 하는 방식엔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최옥란의 의지가 강했고,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연이은 자살소식이 들린 상황에서 최저생계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무기한 농성이 아닌 7일간의 농성을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2001년 12월 3일 월요일 오후 2시, 명동성당 앞에서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단”이 농성 돌입 기자회견을 열었다.

 

 

*          *          *

 

1) 전장협활동기록집 ‘장애해방 그 한길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2002년 10월.


▷ 3부 : 나의 남겨진 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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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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