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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연 ①] 유서가 된 죽음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박기연의 삶과 죽음 ①
등록일 [ 2019년11월22일 20시08분 ]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① 김순석(1952~1984.9.19) 장애인 이동권 등에 항의하며 유서 남기고 자결 _ 정창조
② 최정환(1958~1995.3.21)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 _ 강혜민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④ 박흥수(1958~2001.7.2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정창조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유서가 된 죽음

 

그날 한낮의 공기는 32도까지 올랐다. 여름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늘은 흐렸다. 더위가 한풀 꺾인 시각, 박기연은 서울지하철 1호선 간석역 플랫폼 위에 있었다.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해온 낡은 전동휠체어에 여느 때처럼 몸을 맡긴 채였다. 박기연의 마음은 구름보다 두터운 잿빛이었다. 그는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다. 플랫폼에 선 다른 이들처럼 그 또한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기다림의 이유는 달랐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거나 누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 없었다. 그가 목적한 행선지는 삶의 끝이었다.

 

간석역으로 인천행 열차가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 그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선로를 향해 전동휠체어를 움직였다. 단말마의 비명도 없이 48년의 삶이 멈췄다. 2006년 6월 2일의 일이었다.

 

장애인 교육권 확보를 위해 2005년 7월, 인천시 교육감실 점거 농성 당시 박기연 열사의 모습. 뒤로 “농성 3일째”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박기연은 혼자서는 신변처리를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었다. 글을 몰랐고, 말조차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어장애가 심한 편이었다. 박기연은 고령에다가 치매까지 앓고 있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형제가 있었지만 큰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성당을 통한 자원봉사자나 이웃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또한 일부에 불과했다. 더구나 사망하기 몇 달 전에는 장 수술을 했고, 몸이 채 낫기도 전에 휠체어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오십을 향해가면서 기력이 부쩍 쇠해간다는 느낌도 받았을 것이다.

 

월드컵 뉴스의 홍수 속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한 몇 안 되는 뉴스들은 ‘1급 뇌병변장애인’ ‘비관’ ‘자살’ 등의 말로 그의 죽음을 요약했다. 이러한 단편적 정보만으로도 어떤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등질만했다고 재빨리 이해했다. 그들은 장애인의 삶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박기연의 죽음은 세상의 수많은 불운 중 하나에 불과했고, 사유하지 않아도 되는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안타까워했지만 분노하지 않았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슬픔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들에게 박기연은 그렇게 떠나보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답을 알면서도 오랜 시간 수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도대체 그가 왜 그랬을까. 왜, 그가 죽어야만 했을까.

 

박기연은 유서를 남기진 못 했지만,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간석역으로 향하기 전, 박기연은 그가 활동하던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아래 인뇌협) 사무실을 다녀갔다.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모두 두 번이었다. 오전에 들렀을 때 그는 곁에 있던 이들에게 ‘너무 힘들다’ ‘오늘 죽으러 간다’는 말을 했다. 사람들은 그저 농담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들이 아는 박기연은 삶을 비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후에 사무실을 나온 박기연은 아마도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제물포역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의 집은 차이나타운이 있는 북성동이었다. 집으로 가려면 인천역 방면으로 가야 했지만, 그는 정반대로 갔다. 어째서 제물포역도, 인천역도 아닌, 간석역이었을까. 그곳까지 가는 동안 박기연은 많은 망설임과 결정의 산을 넘었을 것이다. 결코 즉흥적이지 않았을 박기연의 선택을 남겨진 사람들은 그의 유서로 읽었다.

 

그들에게 박기연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아니라 ‘살 수 있던 죽음’이었다. 그를 알던 사람들은 활동지원서비스만 있었다면 그가 결코 자기 목숨을 내던지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입을 모았다. 앞서도 말했지만, 박기연은 쉽게 비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생전에 박기연이 투쟁을 통해 간절히 요구했던 것 역시 활동지원제도의 도입이었다.

 

그의 사후, 박기연의 ‘유서’를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인천시청 앞에 모였다.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장애운동단체들의 강력한 투쟁은 15일간 이어졌다. 결국 인천시는 활동지원제도화 요구를 수용하고, 인천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활동지원 시범사업을 실시한 지역이 되었다. 이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인천장애운동의 계절은 봄에서 여름을 향해 달려갔다.

 

지하철 승강장에 휠체어 탄 사람이 있다. 사진 Igor Rodrigues on Unsplash

 

잃어버린 이야기

 

그에 관해 기록된 기존의 자료들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대략 이 정도의 사실이었다. 박기연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정보들이지만, 이 문장들이 박기연의 삶과 죽음을 설명하는 ‘모든’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몇 가지의 사실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좀 더 세심한 이야기를 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박기연의 활동가로서의 이력은 2002년부터 시작한다. 박기연은 1959년 5월 25일에 태어났다. 2002년 즈음 그는 마흔넷이었다. 박기연에 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을 찾아다녔지만, 2002년 이전의 박기연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관해선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가족이나 이웃과 연결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살아있었다면 올해 환갑을 맞이했을 박기연은 차이나타운이 있는 인천 북성동 일대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어린 시절이나 가족관계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형들도 여럿이었고 누나도 있었다지만,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막내였다. 그가 4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박기연의 삶도 ‘괜찮았다’고 한다. 아마 그때는 누나도 함께였던 것 같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누나도 결혼을 하면서 집을 떠났다. 다른 형제들이 언제 모두 집을 떠났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박기연의 곁에는 치매를 앓는 아버지만 남았다. 몇 번째인지 모를 형 하나가 그나마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라도 들려준 사람 중 하나는 인천장애인교육권연대 김광백 사무국장이었다. 그는 2006년 6월 2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박기연의 누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기연이 형이 죽었다고, 병원에 와 달라는 전화였어요.”

 

김광백 사무국장은 2003년 가을 무렵부터 박기연과 몇 달간 함께 산 적이 있다. 그때 남겨둔 그의 연락처가 나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김 사무국장은 박기연의 누나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자살이라기보다는 가족들이 잘못해서 죽였다고 이해하고 계셨어요. 누님이 너무나 큰 죄책감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2년 정도까지 기일을 같이 보냈다가 연락을 더 이상 안 하신 것도, 아마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요. 누님 입장에서는 (아버님도 돌아가시면서) 이곳에 남은 가족이 다 없어진 거니까 굳이 와서 힘든 기억을 살리시는 게... 부담이 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장애인의 존엄과 삶의 권리를 고민하지 않는 사회는 가족들에게 모든 돌봄의 짐을 지웠고, 마음에 자책감마저 새겨 넣었다. 그들의 가슴엔 깊고 검은 상처가 패였고, 고통은 오로지 사적인 것이 되어 그 틈 속에 봉인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박기연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조각 일부를 맞출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사라졌을 이야기의 조각들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우리는 과연 이 거대한 비극이자 저항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더듬어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활동의 시작

 

인터뷰를 요청할 수 있었던 사람 중에서 박기연과의 가장 오래된 기억을 담은 이는 인뇌협 신영노 지부장이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천주교 인천교구 남성장애인자조모임 ‘엠마우스’에서 박기연을 처음 만났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1995년의 일이다.

 

“성당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이 있었어요. 그때 내가 어려서인지 웃으며 반겨주셨어요. 저하고 기연이 형이 열일곱 살 차이가 나거든요. 환히 웃으면서 반겨주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더군다나 그 형만 전동휠체어를 탔거든요. 처음에는 친분이 별로 없었는데 그 모임에서 여행을 갔다가 친해졌죠. 저한테는... 그냥 동네 형. (웃음) 그냥 마음이 갔어요. 이상하게 마음이 갔어요. 아무래도 언어장애가 있으니까 깊은 대화는 못 하고, 주로 얘기는 내가 하고 그 형은 보고만 있다가 웃고 그런 정도였죠.”

 

엠마우스는 천주교에서 장애인 사목을 목적으로 1981년 창립했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엠마우스가 박기연이 세상과 접촉하는 주요한 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인천의 장애인운동은 관변단체, 지체장애인 중심이었고 본격적인 장애인운동이 형성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박기연이 거주한 북성동에는 해안성당이 있으며, 엠마우스 모임이 이루어지는 답동성당 또한 지근거리에 있었다. 성당을 통한 봉사자들의 도움은 사회적 지원체계가 지금보다 훨씬 미비했던 시절에 박기연의 삶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전동휠체어를 기증받은 일처럼 말이다.

 

해안성당의 모습. 활동지원제도가 없던 시절, 박기연 열사는 해안성당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사진 박희정
 

그러나 당시 박기연과 같은 중증장애인들이 미사나 성당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기연이 활동하던 시기인 2002년 9월 엠마우스 회원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한 인터뷰1)에 따르면, 당시 성당에서 주관하는 장애인과 관련한 프로그램은 대개 방문과 일시적인 도움에 머물렀다.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회원과 그렇지 않은 회원의 수는 비등비등했는데,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은 주로 중증장애인들이었다. 미사 외 활동에서도 장애가 심할수록 참여하지 못한다는 응답이 높아졌다. 인천교구 내 성당들에 이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고 봉사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전반적인 환경에 관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 시기 박기연의 생각과 구체적 행적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으므로,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그저 짐작과 추측일 뿐이다. 그는 삶을 버리기 전까지 성당을 계속 다녔고, 그에게 꾸준한 도움을 주는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따뜻한 관계였을 것이다. 신앙 자체가 그에게 특별한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장애를 차별하는 세상의 구조를 인식했다.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늘 듣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성당과 동네 밖 넓은 세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변화를 감지했다. 그것은 2000년대 들어 서울을 중심으로 장애인이동권 투쟁이 펼쳐지자, 그가 전동휠체어를 움직여 투쟁의 현장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                  *                   *

 

1) 천주교 인천교구 엠마우스의 예를 통해 바라본 장애인 사목의 미래, 신대근, 인천가톨릭대대학원 석사논문, 2004

 

▷ ②부 : 나의 싸움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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