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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최전선에서 투쟁한 ‘장애해방열사’를 기록하는 사람들
[차담회] 비마이너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취약한 기억에 안정된 거처를 마련해주는 것이 기록의 역할
등록일 [ 2019년11월28일 17시55분 ]

비마이너는 2019년 하반기에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기획 연재를 진행하고 있다. (▷ 기획연재 기사 바로가기)

 

이에 비마이너와 노들장애학궁리소(아래 궁리소)는 21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유리빌딩 4층 들다방에서 차담회를 열고 장애해방열사 기획연재의 기록자들이 연재하며 느꼈던 고민과 당시 장애운동의 현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진행은 김도현 비마이너 발행인이 맡고, 정창조 궁리소 연구활동가, 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그리고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이 패널로 참석했다.

 

비마이너와 노들장애학궁리소는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유리빌딩 4층 들다방에서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차담회를 열었다. 왼쪽에서부터 김도현 비마이너 발행인, 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사진 강혜민

 

정 연구활동가는 이번 연재에서 서문과 김순석 열사(1952~1984.9.19), 박흥수 열사(1958~2001.7.23)에 대한 기록을 맡았다. 김순석 열사는 1984년 ‘거리의 턱을 없애 달라’는 장문의 유서를 서울시장 앞으로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장애 문제를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으로 인식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항거로 평가받고 있다. 박흥수 열사는 노점이 장애인의 유일한 노동이었던 90년대, 노점을 통한 장애인의 자립을 꿈꾸며 최정환·이덕인 열사 투쟁을 비롯한 장애노점운동에 헌신하였다.

 

홍 인권기록활동가는 정태수 열사(1968~2002.3.3)에 대한 기록을 맡았다. 정태수 열사는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아래 장청),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의 조직 활동가로 활동하며, 전국을 돌며 수개월간 장애인들을 조직하여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1996년)를 성황리에 마쳤다. 그는 장애인문제를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마련한 장애인청년학교 마지막 날(2002년 3월 2일), 수료식을 겸한 모꼬지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당시 그의 장례식에는 2000여 명의 장애운동가들이 몰려들 정도였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진보적 장애운동계는 매년 3월 1일에 정태수 열사 추모제를 열고 ‘정태수상’을 수상하고 있다.

 

- 취약한 기억에 안정된 거처를 마련해주는 것이 기록의 역할

 

김도현: 2000년에 처음 장애운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장애운동의 역사는 전장협에서 정리한 A4용지 8장짜리 자료가 전부였다. 장애운동가들이 당면한 과제들에 급급하다 보니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잘할 수 없었다. 이번 기획은 그동안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에 소홀했다는 생각에 시작한 야심 찬 연재였는데 정작 기사에 대한 호응은 미지근하다. 그러나 어떤 연재보다 의미 있는 작업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한다. 정창조 연구활동가가 이번 연재의 서문을 썼는데 서문의 핵심내용은 무엇인가.

 

정창조: 사실 주류 운동권의 열사 이야기는 있지만, 장애운동사는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아 이번 기회를 통해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애해방열사들의 삶 자체가 그들이 살던 시대의 모순과 차별의 현실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과거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은 그러한 모순을 이어나가는 현재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애해방열사 뿐만 아니라 오늘날 열사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과연 열사의 시대는 끝났을까? 김지하 시인은 91년도 열사 정국 시기에 ‘열사 전염병’을 끊으라고 했다. 참여정부 때도 “민주화된 시기에 열사를 탄생시키는 전통을 마련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말이 노무현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정도였다. 장애해방열사에 대한 추모제도 단지 습관적인 행사로 여겨지곤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대에 열사는 의미가 없어도 되는 사람인가?

 

그러나 지금도 많은 이들이 죽고 있다. 열사 시대가 끝났다는 말 자체가 섣부른 판단 아닌가. 시대와 싸웠던 사람들, 그리고 시대를 폭로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중요하다. 장애인은 역사 속에서 기록이 안 되거나 기록되더라도 승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동정하는 대상으로 다뤄진다. 승자의 미덕을 드러내기 위해 동정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장애인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시각을 바꾸고 깰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장애해방열사들이다. 시대의 최전선에 있었던 이들을 드러냄으로써 장애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열사를 기억한다고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에게 기억을 물어보면 많이 파편화되어있고, 뚜렷한 기억들이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취약한 기억에 안정된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게 기록의 역할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머릿속, 심장의 뜨거움으로만 남으면 기억은 흐릿해지고, 후대 사람들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안정적 토대를 갖지 못한다.

 

2013년 3월 26일 열린 장애해방운동가 합동추모제. 장애해방운동가 영정 앞에 하얀 국화가 놓여 있다.
 

- 사후 인터뷰, 한 사람의 일생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일

 

김도현: 홍은전 활동가는 정태수 열사에 대해 작업해보고 싶다고 먼저 말했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홍은전: 열사 중 가장 자료가 많은 인물이 정태수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냉큼 하겠다고 했는데, 그때의 내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웃음). 수습을 못 하고 있다.

 

내게 정태수 열사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는 2001년부터 야학교사가 됐는데 정태수 열사는 2002년 초에 돌아가셨다. 생전 본적 없지만, 야학의 봄을 알리는 3월 1일에는 늘 정태수 열사의 추모제가 열린다. 봄의 기운이 충만할 때, 그를 아끼는 동료들이 가족 단위로 와서 추모제를 하고 함께 저녁밥을 잘 차려 먹는다. 장애계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행사를 매해 경험하면서 나는 정태수를 잘 안다고 착각했다.

 

정태수를 떠올리면 박경석 교장이 생각난다. 정태수 열사 추모 영상에서 박경석은 눈과 코가 다 빨개진 채 슬프게 운다. 하관식을 할 때도 너무 불쌍하게 운다. 내게 정태수의 인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정태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박경석의 얼굴. 그리고 정태수의 배우자 김영희 언니의 아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단하게 장례를 치르고 있는 여성의 얼굴. 정태수 열사에 대해 작업을 하면 나는 이 두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정태수는 왜 그렇게 중요했었는지 물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김영희 언니로부터 정태수 열사와의 야반도주 러브스토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 재미있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정태수는 김영희와 박경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아주 많은 사람의 친구였고 후배였고 선배였던 사람이다. 정태수의 일생을 그렇게 복원할 수는 없어 아직도 마감을 못 하고 있다.

 

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와 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사진 강혜민
 

김도현: 사전에 ‘마감도 못 하고 차담회에 가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고 했는데 어떤 부분이 그렇게 어려워 한 달씩이나 원고가 미뤄진 건가?

 

홍은전: 과거에 세월호와 형제복지원 인터뷰를 했었다. 그러면서 나는 죽은 사람에 관한 인터뷰를 해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기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이건 그렇지 않았다. 여러 사람의 이야길 듣고 그의 인생을 정리해야 했는데 ‘이건 내가 처음 해보는 작업이구나’ 싶었다. 너무 어려웠다. 박경석, 김영희 등 개별 인터뷰는 좋았는데 이것을 모아놓은 것 자체가 정태수는 아닌 것 같았다. 이것은 박경석이고 김영희인 것 같았다. 예를 들어, 김영희와 정태수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를 ‘정태수의 투쟁’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인터뷰하고 보니 독립적인 여성인 김영희가 만든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태수가 김영희를 만났기에 가능한 ‘김영희의 투쟁’인 것이다.

 

지난 18년 동안 정태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와서 그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해체하고 보니 너무 막막하다. 마치 완성된 레고 작품이 있는데 모두 해체해서 다시 조립하는 느낌이다. 

 

정창조: 정태수 열사의 사랑 이야기를 하니… 박흥수 열사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즉 열사가 남긴 말들이 힘을 가지려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야 하는데, 그것은 운동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개인사가 드러날 때 가능한 것 같다. 그걸 알고서 열사의 말을 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큰 사건의 맥락 속에서만 사람을 기억한다면 이 사람이 어떤 개성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술을 마시면 주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사람들과 어떤 우정을 맺었는지, 이러한 소소한 기록이 그가 ‘누구임’을 드러낸다.

 

차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 사진 강혜민
 

- 끊어지고 드러나지 않던 역사, 기록을 통해 메꾸다

 

김도현: 기록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과거 자료들을 찾은 것으로 안다. 그 과정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나 인상적인 발견이 있나?

 

홍은전: 선배들로부터 이전 세대 장애운동에 대해 수없이 들었으나, 아빠가 술 취해서 하는 말에 귀 닫는 것처럼 잘 듣지 않았다. 90년대 장애운동, 그러니깐 95년도에 있었던 최정환(1958~1995.3.21), 이덕인(1967~1995.11.28) 열사 이야기가 새롭게 들렸다.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나는 최정환, 이덕인 열사들의 투쟁이 노점상 쪽의 운동이고 장애인은 연대했다고 생각했지, ‘장애운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시기에 왜 장애계의 투쟁이 노점상에 있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많은 장애인 활동가들이 생계를 위해 노점을 했다. 최옥란 열사(1966~2002.3.26)도 노점을 했는데 노점 때문에 기초생활수급비가 끊기니까 싸우다 돌아가셨다. 나는 이제까지 이러한 맥락이 이어지지 않았는데, 그 시대를 산 선배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정창조: 박흥수 열사가 너무 박경석 교장 위주로 기억되고 있구나 새삼 느꼈다. 박경석은 현재 장애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박흥수 정신을 이어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박흥수 열사가 열심히 활동하던 시절의 박경석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현재는 박흥수 정신을 잇지 않고 살아가나 과거 박흥수와 열심히 활동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박경석의 말에는 드러나지 않는 박흥수 열사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다.

 

박흥수 열사는 사상적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니나 운동에 관한 뚜렷한 사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엘리트들이 혁명은 시작할 수 있어도 그 혁명을 끝내는 것은 민중”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언제나 민중성을 강조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혁명의 주체라고 말하며, ‘장청’을 포함한 엘리트가 주도하는 장애운동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앵벌이 장애인들의 단체인 ‘대한성인장애인복지협의회’를 조직하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고 한다.

 

95년 최정환이 죽고 난 후 문민정부 이래로 가장 큰 투쟁이 벌어졌다. ‘전국노점상연합회’와 ‘전장협’이 노점을 통해 장애인이 자립할 방안을 찾아보자며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를 결성했다. 자립을 통해 장애인도 운동의 주체로 설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전장협에서 노점분과를 만들고 이를 박흥수가 이끌었다. 박흥수 열사는 최정환·이덕인 열사 투쟁에 열심히 결합했고 장자추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우리는 지금 서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이날 차담회에는 우동민 열사(1968~2011.1.2)에 관한 기록을 맡은 홍세미 기록가, 그리고 최옥란 열사를 기록한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도 참여해 기록 과정에 관한 고민을 나누었다.

 

2011년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우동민 열사를 기록 중인 홍세미 기록가는 “작은 조각보를 하나하나 잇는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홍 기록가는 “우동민 열사는 중증의 언어장애가 있어서 사람들의 기억이 많지 않은 편이다”면서 “사실 재가장애인은 시설에 있는 장애인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겠지 싶었는데, 재가장애인이야 말로 사각지대에 있고 시설 못지않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간절히 자립을 원하며 이를 위해 투쟁한 그의 이야기를 정리 중이다.”라고 전했다. 

 

최옥란 열사 기록을 한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사진 강혜민
 

김윤영 사무국장은 아홉 분의 열사 중 유일한 여성인 최옥란 열사에 관한 기록을 맡았다. 김 사무국장이 활동하는 빈곤사회연대는 기초생활수급권 문제를 제기하며 2002년 사망한 최옥란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꾸려진 단체이기도 하다.

 

이날 김 사무국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최 열사가 입체적으로 읽히지 않은 점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대다수 남성들은 역사적 사건이나 당시 정권에 비춰서 자신을 설명하는 반면,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자신을 재구성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최옥란 열사 또한 마찬가지였다”면서 “우리는 그의 인생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생활 경로에 대해서만 뿌옇게 알고 있었을 뿐 장애운동과 한국사회의 흐름 안에서 그가 어디쯤 위치했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최옥란 열사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어 좋으면서도, 이를 꿰맞춰 이야기한다는 게 새로운 줄기를 만들어버리는 것이기도 해서 조심스럽기도 했다”라고 소회를 전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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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연 기자 gayeon@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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