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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①] 혼자 남은 아이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진보적 장애인운동 조직 활동가 정태수 열사 약전(略傳) ①
등록일 [ 2019년12월03일 09시57분 ]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① 김순석(1952~1984.9.19) 장애인 이동권 등에 항의하며 유서 남기고 자결 _ 정창조
② 최정환(1958~1995.3.21)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 _ 강혜민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④ 박흥수(1958~2001.7.2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정창조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1] 진보적 장애인운동 조직 활동가 정태수 열사 약전(略傳)
[2] 정태수의 동지이자 배우자 김영희 인터뷰
[3] 정태수의 친구이자 동지 박경석 인터뷰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 혼자 남은 아이

 

서울 명일동 어느 카페에서 정태수 열사의 어머니 강영자 님을 만났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는 작은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걸어왔다. 열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 왔다고 말하자 어머니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나를 통과해 먼 곳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것들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누가 물어봐도 대답하기 싫어…”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인터뷰 내내 그 말을 반복하면서 어머니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76년 태수는 또래 아이들보다 2년 늦게 학교에 입학했다. 또래들보다 덩치가 큰, 목발 짚은 사람이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정태수는 1967년 겨울 제주 모슬포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고, 생후 10개월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병원에 입원해서 한 달을 있었는데 어느 날 퍼뜩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병원 말만 듣고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그땐 그게 유행성이란 것도 모르고 병원을 나와서 2년을 방황했어. 애를 업고 안 가본 데 없이 돌아다녔어. 무당도 찾아가고 침도 맞으러 다니고. 그런데 뭘 해도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애를 외할머니한테 맡겼어요. 가정이 밑바닥까지 닿으니까 어쩔 수가 없었어요. 태수가 서너 살 때 2년 동안 거기서 지냈어요.”

 

딱 이만큼 말하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45년 전 어린 아들을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돌아서던 그 날도 어머니는 이렇게 울었을 것이다.
 
“너무 힘들었어요. 부부가 같이 장사해서 그럭저럭 먹고살 만은 했는데, 태수가 소아마비 걸린 후에는 내가 완전히 손을 놓고 떠돌았어요. 아주 의지할 곳 없이 가난해서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됐어요. 태수 맡겨놓고 오만 장사를 다 했지. 먹고 살려고 발버둥을 쳤어. 고무신도 팔고 건축 자재도 팔고.”

 

2년 후 형편이 조금 펴지자 어머니는 태수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 시절 제주엔 소아마비가 유행했다. 동네엔 다리를 제대로 못 쓰는 아이들이 태수 말고도 여럿 더 있었다. 어머니의 친구 아들도 소아마비였고 어머니 어린 시절 담임선생님의 아이도 소아마비였다. 친구는 어느 날 “부산 동래온천 물이 그렇게 좋다더라” 하며 어머니에게 딱 1년만 아이들과 함께 살다 오자고 했다. 장사를 해야 했던 어머니는 집을 오래 비울 형편이 못 되었다. 친구는 저 혼자 아이와 함께 부산에 살러 갔고, 1년 후 돌아온 친구의 아이는 지팡이(목발)를 한 개만 짚었다. 어머니에겐 평생의 회한이 되었다.

 

“그때 집안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산에 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태수도 지팡이를 한 개만 짚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루는 한 엄마가 경남 마산의 어느 복지시설에서 태수 같은 아이들을 미국으로 입양 보내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엄마의 아이 역시 소아마비였다. 

 

“태수하고 그 아이를 거기에 보냈어요. 태수는 거기서 1년쯤 지냈어요. 나중에 태수 차례가 되었는데… 나는 도저히 못 보내겠더라고… 그 엄마가 태수는 똑똑하니까 미국에서도 잘 적응할 거라는 데도 정말 나는 못 보내겠더라고. 그 엄마 아이는 입양 가고 나는 태수를 데려왔어요.”

 

45년 전의 고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팔순의 어머니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지난 것들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

 

집에서 책을 읽는 어린 시절의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어머니는 태수를 데리고 제주로 돌아왔다. 1976년 태수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2년 늦게, 두 살 아래 남동생과 함께 학교에 입학했다. 일을 하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이 숙제를 챙기고 가방을 들어주며 ‘엄마 노릇’을 했다. 박정희 정권이 대대적으로 시행했던 새마을사업 덕에 건축자재를 판매했던 부부의 사업이 제법 잘 되었다. 먹고살 걱정을 덜게 되자 어머니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아들을 향한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은 돈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장애인이라고 하면 부모까지도 천하게 봤어요. 제주도가 그땐 아주 폐쇄적인 작은 섬이었어요. 그릇이 작으니까 편견도 강하지. 병신이라고 놀리거나 때리는 건 아니지만 그냥 말 한마디 한마디에… 태수 초등학교 다닐 때 내가 학교까지 업어서 데려다줬는데, 나는 가정에서 살림만 하는 입장이 못 되니까 시간 맞춰서 업으러 가는 게 어려웠어요. 늦게 학교에 도착하면… 태수 친구들은 다 집에 갔는데 그 조그만 게 엄마 기다리면서 혼자 남아있는 모습이 너무 서러워… 그런 아이를 보는 게 제일 괴로웠죠. 큰 데로 가면 이런 설움 안 받을까… 인간 대접받으면서 살 수 있는 곳으로 데려오고 싶었지. 내가 태수한테 해줄 게 그것밖에 없었어.”

 

1980년 태수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부는 하던 장사를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했다. 그 후 아들은 큰 걱정을 끼치지 않고 잘 성장해주었다. 활발하고 긍정적이었다. “다른 부모들은 장애인 자식을 숨기고 싶어 한다는데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은 게 너무 좋다”며 오히려 엄마에게 힘을 주는 아들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많은 사람들이 정태수 열사를 좋아하고 따랐다더라”고 하자, 인터뷰 내내 먼 곳을 향해 있던 어머니의 시선이 처음으로 나를 향했다. 가족한테도 참 잘했다며 어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내친김에 아들에 대한 기억 중 제일 기뻤던 일을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의 시계가 2002년 3월로 훌쩍 뛰었다.


“태수 갈 때…”   


그가 울면서 동시에 웃었다.  

 

정태수는 2002년 3월 3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청년 활동가들을 조직하기 위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장애인청년학교 수료식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너무도 이르고 급작스러운 것이어서 그를 사랑하는 동료들은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장례식엔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조문객들이 끊이지 않아 빈소를 한 칸씩 한 칸씩 늘려가며 장례를 치러야 했다. 빈소엔 노래 ‘태수야’가 울려 퍼졌다. 평소 그를 아꼈던 작곡가 김호철이 그의 부음을 듣고 하루 만에 만든 것이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 속에서도 사랑하는 벗이 홀로 떠나는 길이 덜 외롭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눈물을 참느라 애를 먹으며 노래를 만들고 편곡하고 부르고 녹음해 그의 영전에 놓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울어줘서 많이 감동했어요. 아, 너는 헛되이 살지 않았구나… 내가 너를 데리고 바다 건너온 보람이 있구나… 고맙다, 아들아.”
 
어머니는 언제나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돌아서야 했다. 외가에서, 바다 건너 어느 입양 시설에서, 친구들이 모두 돌아간 빈 교실에서, 태수는 혼자 남아 엄마를 기다렸다. 떠나는 엄마를 올려다보던 아들의 얼굴이 평생 가슴속에 사무쳤는데 이번에 남겨진 건 어머니 자신이었고 떠나는 건 태수였다. 비통하고 슬펐지만 어머니는 진심으로 기뻤다. 태수의 곁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떠나는 아들이 얼마나 발걸음을 떼기 어려울지 어머니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장례식장엔 태수의 여섯 살 된 딸이 천진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짐했다.

 

“잘 가라, 아들아. 너의 딸은 내가 반드시 지켜주마. 뒤돌아보지 말고 가거라.”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 ②부에서 계속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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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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