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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남겨두지 않으려면
[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수많은 참사 이후에도 안전을 영수증처럼 버리는 사회
등록일 [ 2019년12월04일 12시29분 ]

20XX년 11월 19일 화요일 오후 2시, 갑자기 연세대학교 건물이 사방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학교에는 휠체어를 탄 학생을 비롯해 수천 명이 있었다. 강의실의 빔프로젝터는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고 교수님들은 어찌할 줄 모른 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울에 규모 6.8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재난 문자가 왔다. 가족에게 연락하려고 전화를 꺼냈지만 불통이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고 머리가 하얘졌다.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No One Left Behind — 장애포괄 재난대비 시나리오 워크숍' 2019년 11월 19일(화) 19:00~21:00.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지하1층 B11-18 장애인권위원회실. 주관 리슨투더시티. 후원 서울특별시


11월 19일, 내가 속한 대학 안의 단체에서는 얼마 전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워크숍을 진행한 ‘리슨투더시티’의 주관하에 같은 이름의 재난 대비 워크숍을 진행했다. 규모 6.8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대피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상상하고 공부하는 자리였는데, 문득 민방위 훈련이 떠올랐다. 나는 질병으로 인해 병무청에서 5급이라는 신체 등급을 받아 군대에 가지 않았고, 그래서 예비군 훈련을 건너뛰고 민방위 훈련 통지서가 먼저 날아왔다. 대학생이니 이를 미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물어봤더니 미룰 수 없다고 하기에 과태료 100,000원을 피하려고 어쩔 수 없이 다녀왔다.


민방위 교육의 대상과 내용에서는 누가 보호의 대상이고 주체인지가 너무 분명히 보였다. 훈련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계단이었고, “심신장애인”은 교육 대상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대학생”과 “만성허약자”도 교육 대상자가 아니었다. 나는 문득 억울해졌다. (찾아보니 “만성허약자”는 신체 등급 6급이어야 했지만) 만성적으로 허약한 대학생인 나는 왜 여기 와 있는가! 내가 민방위 교육을 미룰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안내한 동사무소 직원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교육을 받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교육 내용의 대부분은 재난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불을 끄고, 화재 현장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자세히 배웠고, 위급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돕는 방법을 배웠다. 이렇게 중요한 교육을 빠지려고 했다니! 분야를 가리지 않는 나의 ‘귀차니즘’을 반성하자마자, 교육 대상자의 구성에 대한 큰 당혹감이 밀려왔다. 아니, 이런 중요한 교육을 특정 연령대의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만 받고 있단 말이야? 실제로 교육의 내용을 생각해 볼 때, 대부분의 조치는 오직 비장애인의 몸에 한정되어 있었다. 영미권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름을 딴 복잡한 매듭법을 (이를테면 ‘에반스 매듭법’) 3~4종류 빠르게 배웠는데, 손을 꽤 섬세하고 빠르게 움직여야만 수행할 수 있는 매듭이었다. 그런데 위급 상황에 매듭을 묶어서 그걸 또 내 몸에 연결하고 그걸 다시 창문에 연결해서 탈출하는 게 과연 모두에게 가능할까?


교육 내내 영상, 사진, 혹은 모형으로 등장한 몸도 모두 비장애인이었고,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강사님이 비상벨을 이야기할 때 소리만 나는 것이 아니라 빛이 반짝거리는 이유를 설명할 때 청각장애인이 딱 한 번 언급된 것을 빼면 모든 대피자와 대피유도자는 비장애인이었다. 기본적으로 일정 높이 이상의 창문을 올라가고, 통과하고, 완강기로 인한 물리적 영향을 견딜 수 있는 몸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교육 방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식의 교육 내용은 비장애인이 생활하는 것을 전제로 한 공간 설계의 문제가 컸다. 모든 건물에는 위급 시에 창문과 함께 열 수 있는 더 넓고 낮은 탈출구가 필요하지 않나.


시설만 문제는 아니었다. 대피 교육 이후에 진행된 것은 응급처치였다. 인공호흡 방법과 심장 제세동기 사용 방법을 배웠는데, 여기서 여러 걱정이 생겼다. 어디서도 가르쳐 주지 않아서 나도 처음 고민해 보았기에 정답은 전혀 모르지만, 심장질환자에게도 몸의 무게를 실어서 심장을 누르고 전기충격을 가하는 방식이 안전할까? 근육병 환자에게 이러한 방식의 응급처치를 진행했을 때 뼈나 장기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인공와우나 보청기 등 전자기기가 몸 내외에 붙어 있는 사람에게 전기충격을 가했을 때 기계, 그리고 기계와 연결된 몸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 나는 이 중 어떤 것도 응급처치 교육에서 배울 수 없었다. 나에게 그 응급처치 교육은 너무나 협소했다. 민방위 교육은 철저히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만의 영역이었다. 이런 교육만 받아서는 위급한 상황에서 내가 친구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주변에는 질병이나 장애가 있어서, 교육에 나오지 않는 몸을 가진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의문을 안은 채로 일주일 후에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워크숍에 참여했다. 워크숍에서는 민방위 교육보다 훨씬 많은 것이 고려되었다. 장애 포괄 재난 대비인 만큼, 오히려 장애인의 대피 조건이 교육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인공와우나 보청기의 전력이 떨어진 상황, 안경을 잃어버린 상황, 휠체어 배터리가 없거나 계단을 마주한 상황, 주변의 비장애인이 모두 먼저 대피한 상황, 너무 시끄럽거나 어두워서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 몸을 맡겨야 하는 상황, ……. 나는, 우리는 계속해서 되묻게 되었다. ‘과연 우리는 누구도 남겨두지 않고 탈출할 수 있을까?’


그토록 급박한 상황에서 누구도 남겨두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혼자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떤 도움을 청해야 할까. 건물의 구조 자체가 틀려먹었으니 다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대비가 안 되어 있더라도 어쨌든 지금 이 안에서 어떻게든 생존은 대비해야 한다. 장애인이 대피할 수 있는 다양한 설비들을 설치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계단을 굴러 내려갈 수 있는 휠체어는 아주 비싸다. 사람 목숨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통장이나 신용 등급과는 비교할 수 있지 않은가. 아주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지금 이 글에서 대안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몇 주 동안 고민해 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언제 건물이 무너질지 모르는 긴급 상황에, 조금 가까운 계단으로 친구를 업고 뛰어나갈지, 조금 먼 경사로로 나가서 친구가 휠체어를 탄 채로 함께 나갈지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원래 알든 모르든, 바로 옆에 있는 랜덤한 사람과의 협력이다. 재난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일어날지 모른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재난을 가깝게 여겨야 한다. 그러려면 재난 대비 교육은 모든 몸을 대상으로, 주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 중심의 교육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수많은 참사 이후에도 여전히 안전을 영수증처럼 버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을 때 영수증이 없으면 아주 곤란해진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크론병과 통증을 정체성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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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dheejeh@nave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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