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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②] 태수가 본 세상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진보적 장애인운동 조직 활동가 정태수 열사 약전(略傳) ①
등록일 [ 2019년12월04일 16시28분 ]

▷ ①부 혼자 남은 아이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직업훈련과정과 동문회 ‘싹틈’ 시절(1988~1990년)

 

1988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태수(22세)는 서울 고덕동에 있는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직업훈련 과정에 입학했다. 목공예, 도자기, 수공예, 컴퓨터 등의 과정이 있었는데, 정태수가 택한 것은 전산(컴퓨터)이었다.    

 

“나름 엘리트과였죠. 전산과 동기가 8명이어서 우리는 8비트라고 불렸어요. 뇌성마비 장애인 셋, 소아마비가 넷, 그리고 척수장애인 하나. 태수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서 머리가 짧고 양쪽에 목발을 짚고 다녔어요. 다른 애들은 목발 없이 걸었어요. 태수가 소아마비 장애인 중에서는 제일 중증이었는데 그중에 사람들과 제일 잘 어울렸어요.” (박경석)

 

스물세 살의 나이에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 척수장애인 박경석은 정태수와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썼다.

 

“5년 동안 집구석에서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다가 다시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장애인복지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보다 일곱 살 어린 태수를 만났다. 나는 착한 장애인이었고 태수는 나쁜 장애인이었다. 나는 복지관의 직업재활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르는 것만이 장애인으로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방송국 같은 곳에서 촬영하러 오면 복지관 선생님은 항상 나를 추천했고, 나와 휠체어를 탄 장애여성 한 명을 짝지어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재활 의지를 불태우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럴 때면 태수는 목발을 짚었지만 언제나 날랜 제비처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느 날 박흥수라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목공예과를 졸업한 선배였는데 흥수형이 술을 사주니까 흥수형을 졸졸 따라다니는 무리들이 생겼어요. 태수도 그중 한 사람이었지. 흥수형은 88장애자올림픽을 거부한다면서 올림픽조직위원회를 깡패처럼 점거했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왔다는 그런 이야기를 똘마니들에게 훈장처럼 떠벌렸어요. 술 먹는 게 좋아서 쫓아다니면서도 나는 속으로 ‘지가 뭔데 감히!’ 하고 생각했었죠.” (박경석)

 

그러나 태수는 달랐다. 박흥수의 이야기를 스펀지처럼 흡수했고 박흥수 역시 그런 태수를 애지중지했다.
 
“태수는 술만 먹으면 ‘의연한 산하’라는 노래를 막 불렀어요. (노래 부름) ‘가슴이 빠개지도록 사무치는 이 강산에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거부한다던 / 복종을 달게 받지 않겠다던 / 굳게 서 있으라 의연한 산하’ 나는 좀 기가 찼죠. 이제 갓 고등학교 졸업한 놈이 무슨 놈의 가슴이 그렇게 빠개진다고 복종을 온통 거부한다는 것인지. 내가 본 세상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그는 어떤 세상을 보았기에 흥수형이 하는 이야기에 한 방에 가버렸을까…” (박경석)

 

어느 날 술자리에서 국민체조 거부 투쟁이 모의되었다. 주도한 사람은 정태수였다. 복지관에서는 장애인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점심시간마다 훈련생들에게 국민체조를 시켰는데, 일종의 정신 교육이었다. 직원들과 교사들은 자유롭게 점심시간을 즐겼다. 

 

“나는 해병대 나왔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3년 동안 했어요. 데모는 나쁘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선생님도 화상장애인이었는데, 내 또래였어요, 서글서글하고 열심히 가르쳤어요. 그런 선생님 뒤통수를 어떻게 쳐? 그래서 선생님한테 그 사실을 알려줬죠.(웃음) 선생님들은 훈련생 불러서 야단치고. 결국 모의는 실패했어요. 스무 명 정도 조직했는데 태수하고 두세 명만 체조하러 안 가고 나머지는 다 갔죠, 나도 체조하러 갔고.” (박경석)

 

그 후 동기들은 박경석을 빼고 술을 먹으러 가기 시작했다. 곧 외로워진 박경석은 자존심을 접고 술자리를 기웃거렸다. 박흥수와 정태수는 장애인의 문제가 개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탓이라며, 비참한 장애인의 현실을 바꾸려면 사회를 ‘개량’하는 수준이 아니라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이 좋고 술이 좋아 그들 무리를 쫓아다니던 ‘착한 장애인’ 박경석도 박흥수와 정태수를 만나며 조금씩 ‘나쁜’ 물이 들어갔다. 과격하지만 맞는 것 같았다.

 

1년 후 직업훈련 과정을 수료한 그들 중 누구도 컴퓨터에 관련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정태수는 구두수선 사업장에 취업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그만두었고 당시의 기준으로 가장 중증이었던 휠체어를 탄 박경석에겐 그마저의 기회도 오지 않았다. 장애인 노동권에 대한 아무런 법적 보호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시대였다. 1989년 정태수와 박경석, 박흥수는 직업훈련과정 졸업생들의 동문회 ‘싹틈’의 집행부가 되어, 친목모임의 성격이 강했던 동문회에 운동성을 불어넣을 방법을 고민했다.

 

“동문들의 취업 실태에 대해 조사했어요. 동문들 만나면 다들 하는 소리가 ‘아이고, 취업했다고 다 취업한 게 아니다!’였어요. 예를 들어 수공예는 도제식인데, 그게 말이 좋아 도제이고 숙식 제공이지, 실상은 종 부리듯 한다는 거예요. 집에 데려다 놓고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하루 종일 일을 시키는데 6개월 일하고 5만 원도 안 주더라, 돈 달라고 했더니 쫓아내더라,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쫓겨나서 다시 복지관에 취업 상담 오면 “네가 장애인인데 참아야지” 하면서 정신훈련 받고.” (박경석)

 

1989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이 동문회 ‘싹틈’ 소식지 내용을 문제 삼아 소식지를 압수해가자 정태수 열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복지관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동문들을 만나 설문조사를 해 그들의 서러움과 자기고백을 모아 소식지에 실었다. 복지관 측에선 90% 이상이 취업한다고 홍보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90%가 실업 상태였다.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는 복지관으로서는 민감한 내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복지관 측에서 소식지를 훔쳐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싹틈 회원들은 복지관 측의 사과와 취업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며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을 하기로 했다.

 

“농성이 시작되던 날, 태수가 자기 인생 최초의 점거투쟁이라면서 삭발을 하고 나타났어요. 충격이었죠. 나는 그때까지 태수가 아직 사춘기인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때 그 친구가 얼마나 진지하게 이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겠더라고요. 한편으론 머리가 아팠어요.  나는 그렇게 세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웃음) 복지관 측이라고 해봤자 1년 동안 한솥밥 먹으면서 우리 가르치던 선생들인데, 어느 날 갑자기 “야, OOO! 나와!” 한다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박경석)

 

정태수는 강경파, 박경석은 온건파, 둘 사이를 박흥수가 조율했다. 농성은 15일 후 끝났다. 소식지를 돌려받았고 복지관 측의 사과도 받았다. 취업대책 마련에 대해서는 서울시장과의 면담을 추진키로 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일개 복지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해 복지관 바깥에서는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과 ‘장애인복지법 개정’ 등을 요구하는 장애계의 열기가 뜨거웠다. 정태수는 외부의 장애 청년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연대활동을 펼쳤다. 1989년 11월에는 ‘울림터’ 회원들과 함께 공화당사를 점거하고 양대 법안의 제‧개정을 위해 열흘간 단식농성을 했다. (장애인고용촉진법은 1990년 제정되었고, 핵심은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2%의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9년 11월, 정태수 열사, 최옥란 열사(뒷줄의 두 사람)가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 회원들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 등 양대법안 제·개정을 촉구하며 신민주공화당사를 점거,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1990년 취업의 길은 여전히 꽉 막혀있었고 세상을 변혁하고 싶은 열망은 뚜렷한 방향을 찾지 못했다.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스물네 살의 청년 정태수는 비슷한 처지의 박경석과 함께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재수학원에 다녔다. 빨리 취업해서 자기 때문에 고생한 어머니에게 취업선물을 안겨드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던 박경석과 달리 정태수는 입시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해 6월 한국소아마비협회가 운영하던 장애인 이용시설 ‘정립회관’에 운영 비리 문제가 터졌다. 장애 청년들은 정립회관 이사장실을 점거하고 대표의 퇴진과 구속을 요구하며 45일간 농성했다.
 
“태수는 학원에 출석 체크만 하고 정립회관으로 달려갔어요. 내가 태수한테 딱 1년 만 참고 공부하자고 했는데 그러지 않았지.” (박경석)

 

정태수가 궁금해하고 배우고 싶은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하루는 세 시간을 싸운 적이 있어요. 태수는 의사가 많은 돈을 받는 게 틀렸대. 나는 “너처럼 고등학교 겨우 나온 애가 의사하고 같은 월급을 받으려고 하느냐, 이 파렴치한 놈아” 그랬죠. 우리 형이 의사였거든요. 우리 형은 코피 흘리면서 공부하던데 너처럼 맨날 술 먹고 노는 놈이 어떻게 같은 월급을 받느냐고. 우리 집이 쫄딱 망해서 형이 돈을 많이 벌어야 우리 집을 먹여 살리는데. 그런데 태수가 어디서 마르크스 이런 거 듣고 와서는 나한테 써먹으려고 하니까 나도 질 수 없죠. 그땐 내가 이겼어요. 굉장히 통쾌한 기분이었던 게 아직도 생각나요. 태수가 더 공부해오겠다는 결심을 갖고 돌아가더라고요.” (박경석)

 

정태수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세상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장애인이 개인의 능력을 키워 신분상승을 꾀하는 게 아니라, 장애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자신의 능력을 쓰고 싶었다. 1991년 대학에 떨어진 정태수는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아래 장청)의 활동가가 되어 본격적으로 장애인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박경석은 91학번 대학생이 되었고 3년 후 장청에서 만든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가 되었다. 1997년 노들야학 교장이 된 박경석은 그 후 장애인이동권 투쟁을 일으키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조직했다.

 

“태수의 가장 큰 장점은 먼저 어떤 사람에게 찾아간다는 것. 양쪽으로 목발을 짚고 그게 누구든 배울 것이 있다면 찾아다녔다. 책을 보고 배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 그의 삶이나 가치관, 사회인식 등에 대해 대화를 통해 익혔다. 그 시기 태수는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기 위해 모색하는 시기였던 것 같다. 장애인들은 특히 타인과 관계 맺기가 쉽지 않은데 태수는 아무리 냉소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먼저 다가갔다.” (김수열, 5대 싹틈 동문회장)

 

▷ ③부 살아남은 자, 조직하라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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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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