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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③] 살아남은 자, 조직하라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진보적 장애인운동 조직 활동가 정태수 열사 약전(略傳) ③
등록일 [ 2019년12월05일 17시42분 ]

▷ ②부 태수가 본 세상

 

19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에서 정태수 열사와 박흥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와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조직 활동가 시절(1991년~1997년)

 

19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사회에 민주화의 열망이 들불처럼 번져 갔을 때 장애인운동도 그 영향을 받았다. 장애 문제를 개인이 극복해야 할 것으로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가 구조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아래 장청)는 장애 대중을 조직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청년들의 단체였다. 1991년 결성된 장청은 장애 현안에 대응해 선도적으로 싸우는 와중에, 보다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 전국적인 조직을 건설하려 노력했으나 여러 이유로 그 계획은 좌초되었다.


이후 그 대안으로 새로운 계획이 추진되었는데 첫 번째는 전국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던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와 조직을 통합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장애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기 위한 공간으로써 야학을 만드는 것이었다. 1993년 8월 노들장애인야학이 문을 열었고 장청과 전장협이 통합되었다. 통합된 단체의 이름은 전장협으로 했다. 정태수는 장청과 전장협 모두에서 ‘조직국’을 맡아 활동했다. 조직이란 사람들을 만나 단체의 지향을 공유하고, 그들을 얽거나 짜서 단체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물리적인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당시 전장협의 부회장이었던 김대성은 정태수에게 그 역할을 제안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태수는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일을 참 잘했다. 무게감이 있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또 하나 그의 큰 장점은 추진력이었다. 지역의 지부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출장을 자주 가야 하는데 태수는 추진력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어서 조직국장으로 적격이었다.”

 

2001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동문회 ‘싹틈’ 동문들과 그 가족들이 박흥수 열사 묘소에 다녀오는 길에 식사 후 찍은 단체 사진. 사진 맨 앞에 앉아있는 여자아이는 정태수 열사와 김영희 씨의 딸 세린이다. 사진 날짜 설정이 잘못되어 92년이라고 되어 있다.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 장애인 노점상들의 잇따른 죽음과 투쟁 : 최정환 열사, 이덕인 열사 투쟁 (1995년)

 

1995년 3월, 삼륜오토바이를 이용해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이 분신했다. 구청 단속반에게 스피커와 배터리를 빼앗겼던 최정환이 그날 밤 구청으로 압수당한 물품을 찾으러 갔다가 심하게 모욕을 당하자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불을 붙인 것이었다. 최정환은 전신 88%의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전장협은 비상대책위를 꾸려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고 항의의 표시로 구청 현판과 최정환의 오토바이를 소각했다. 며칠 후 끝내 최정환은 숨을 거두었다.  

 

“그 싸움이 어마어마했어요. 소련이 무너지면서 운동사회가 몰락했지,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라면서 진보적인 척하지, 싸울 만한 거리가 없던 시기였는데 장애인 노점상이 분신한 거야. 장애인들과 노점상들이 시작한 싸움이었는데 “문민정부가 사람 죽이네!” 하면서 전 운동권이 집결한 거예요. 경찰이 시신을 탈취하려고 하니까 대학생들이 영안실 지킨다고 밤새 쇠파이프 들고 사수했어요. 최루탄 쏘고 화염병 던지고, 강남의 병원 앞이 불바다가 됐어요. 연세대에서 노제를 치렀는데 수천 명이 모였어요. 이한열 열사, 박종철 열사 때처럼 어마어마한 상여를 만들었어요.” (김종환)

 

최정환 열사의 장례 투쟁을 마친 전장협은 5월에 전국노점상연합과 함께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를 구성했다. 장애인고용촉진법은 그 실효성이 아직 미미했고 교육 수준이 낮은 장애인들의 취업은 여전히 하늘의 별 따기였다. 노점은 장애인의 생존권과 노동권이 집약된 문제였다. 장자추는 생계가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노점 자리를 마련해주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 장애인 활동가들이 노점을 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장애인운동 활동가들 역시 생계가 막막하긴 마찬가지였고 전장협은 그들에게 활동비를 지급할 경제력이 없었다.

 

“장애인이 노동시장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노점이라도 해서 이 체제 안에서 먹고 살아보자는 거였어요. 장애인 혼자는 힘이 드니 비장애인과 함께 2인 1조로 들어갔죠. 청계천 도깨비시장이 어마어마했거든요. 일요일이면 미어터져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을 정도로. 거길 뒤지면 탱크도 만든다고 할 만큼 없는 게 없었는데 장자추에서 거기 알짜배기 자리를 찍어서 들어갔어요. 자리가 났을 때 지키지 않으면 자리를 뺏기니까 흥수 형이 밤새 오토바이를 대놓고 자리를 지켰어요. 흥수 형이 거기서 장사를 시작해서 나중엔 스무 자리까지 차지했어요.

 

최옥란도 거기서 노점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한 사람씩 노점해서 자립하면 회원도 늘고 조직도 확대되는 거잖아요. 1만 명이 될 수도 있고 10만 명이 될 수도 있고. 6월부터는 인천 아암도에서도 장사를 시작했어요. 송도가 개발이 된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그 옆에 있던 아암도는 해안 풍광이 좋은 아주 작은 섬이었는데 거기 자리 잡으면 떼돈 벌겠다 싶어서 좀 무리하게 추진했어요. 거기 원래 있던 토호 양아치 세력들, 기존의 노점상 세력들하고 엄청 싸워서 포장마차 스무 개인가를 쳐서 장사가 좀 됐어요.” (김종환)

 

이 시기 경찰은 노점 투쟁에 앞장섰던 정태수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고 정태수는 2~3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동료들과 차를 바꿔서 다녔고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고단한 생활이었다. 9월 20일, 정태수는 선배로부터 자신이 경찰과 이야기를 다 해두었으니 조사만 받으면 된다는 말을 듣고 경찰서에 갔다가 그 길로 구속되었다. 인천 구치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른 정태수는 35일 후 10월 25일에 풀려났다.


석방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암도 노점에 대한 철거 소식이었다. 인천시와 연수구청은 아암도 노점을 계속 불허해 오다가 11월 24일 공권력과 용역 1,500명을 동원해 철거에 들어갔다. 30여 명의 노점상들이 망루를 짓고 농성을 벌이던 중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1월 28일 농성자 중 한 명이었던 이덕인이 아암도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상의가 벗겨진 그의 몸엔 상처와 피멍이 가득했고 팔이 뒤로 묶여 있었으며 두 눈은 부릅뜬 채였다. 공권력에 의한 죽음의 흔적이 뚜렷했다. 그러나 충격적인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1,000여 명의 경찰 병력이 영안실에 난입한 것이었다.

 

“박창수 열사 때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었는데, 진짜로 병원 벽을 오함마(쇠로 된 대형 망치)로 부수어서 구멍을 낸 다음에 신참 전경을 그 구멍으로 막 밀어서 집어넣더라고요. 우리는 경찰이 못 들어오게 하려고 그놈 머리를 막 때리니까 피가 철철 나는데도 뒤에서 경찰들은 계속 밀어 넣어. 그렇게 세 군데로 벽을 뚫고 들어왔어요. 우리 말고도 빈소가 많았는데 그놈들이 다 짓밟고 다녔어요. 대학생 두 명인가는 그때 경찰한테 맞아서 실명을 했다니까요. 결국 시신 탈취해서 사인이 익사라고 발표해 버렸어요. 그러고는 시신의 내장을 다 들어내고 살갗만 남겨서 돌려보냈어요. 그렇게 하면 다시 재부검을 할 수 없대요. 어머니는 그게 한이 됐죠, 내 새끼 다 찢어 발겨놨다고. 영안실에서 그 시신을 붙들고 몇 개월을 싸웠어요.” (김종환)

 

95년 12월 16일, 이덕인 열사 장례투쟁. 사진제공 장애해방열사 ‘단’
 

먹고 살기 위해 싸우던 한 장애인의 처참한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국가권력의 폭력을 몸소 경험하며 사람들은 분노를 넘어 충격과 공포로 몸서리쳤다. 그럴수록 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정태수는 이덕인 열사 투쟁위원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싸웠다. 1995년 11월에 시작된 싸움은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되었다.

 

“영안실 싸움이라는 게 힘들어요. 거기서 거의 먹고 자고 하는 건데, 마무리를 잘 못 했어요. 내부적으로 투닥거림도 있었고, 흥수형도 술을 많이 먹고. 전장협이라는 단체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거기만 계속 붙어있을 수도 없고…” (김종환)

 

이덕인의 장례는 1996년 4월 24일에 치러졌다. 최정환과 이덕인의 죽음과 투쟁은 장애인의 생존권 문제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지친 활동가들은 화병으로 속병까지 앓아 죽을 먹어가며 싸워야 했다. 정태수는 힘겨워하는 동료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독려하는 와중에도 이 시기 또 다른 투쟁을 조직하느라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 조직(1996년)

 

정태수에 대한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사람들은 주저 없이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를 꼽았다. 1996년에 열린 이 대회는 13박 15일 동안 제주, 부산, 울산, 광주, 대전, 온양, 청주, 강릉, 성남 등을 거치는 전국 순회 투쟁이었는데,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서울에서 개최하는 대규모 집회였다. 노동권에 대한 전장협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사업이었는데, 이 대회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정태수였다. 정태수의 동료였던 김종환은 정태수의 정신을 노동권과 조직화라고 말했는데, 이 전국적 걷기대회가 바로 그의 지향과 그의 강점이 가장 잘 결합되어 이루어낸 정태수의 작품일 것이다.

 

19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에서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의 모습.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19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에서 정태수 열사(오른쪽).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정태수는 장애인과 관련해 제기되는 교육, 의료, 직업재활 등의 모든 문제는 결국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닌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정리했던 사람이다. 그는 1993년 민주노총 준비위 시절부터 ‘장애인 문제의 핵심은 노동권’이라고 못 박으면서 1996년 범국민걷기대회까지 몰아갔던 주도면밀하고 헌신적인 사람이다. 장애운동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1989년 11월 11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을 위한 결의대회에 1,200명 정도의 대중이 모였는데 1996년 걷기대회는 1,500명 정도가 모였다. 전체 사회운동이 힘들던 시기임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상호)

 

“처음 기획안을 받았을 때 예산이나 기타 여러 면에서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수는 장애인의 고용현실을 알려내고 조직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고 장애인의 날을 겨냥해 언론도 움직이자는 주장으로 강하게 추진했다. 그때 내가 부회장이었는데 좀 자신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서울이 지역을 지원하고 태수가 직접 지역을 돌면서 행사를 진행했다. 당시 거금 200만 원을 들여 서울 행사의 무대도 세웠다. 많은 장애인단체들이 참가했고 참 좋은 경험이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정태수가 아니었다면 기획하고 진행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김대성)

 

“정태수는 이 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전국을 10여 차례나 돌아다녔다.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차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 피곤함 속에서도 지역의 활동가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일주일에 4~5일은 새벽 1~2시에 들어갔고 어쩌다 일찍 들어가더라도 핸드폰으로 몇 시간씩 통화하며 사람들을 챙겼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했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이상호)

 

“태수는 서울에서 생활하는 것보다는 지방에서 활동한 시간이 더 많았다. 워낙 돈이 없었기 때문에 밤새 차를 몰고 가서 차에서 잠을 잔 후 낮에 사람을 만나는 식이었다. 그런 일을 태수는 참 잘했다. 항상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심이었다. 대중들이 스스로 하지 않고서 조직은 살아남을 수 없거니와 운동 자체의 의미도 별로 살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석구)

 

96년 전국을 돌며 장애대중을 조직하던 정태수 열사의 모습.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그 어려운 시기에 장애 대중을 조직해서 ‘데모’로 표현해낸다는 건 무지무지 어려웠을 거예요. 장애인단체조차 시혜와 동정의 떡고물을 받기 위해 앵벌이를 하고 이권 다툼을 하던 시대였어요. 전장협의 지역 지부들은 술 먹고 놀다 헤어지는 식의 친목모임 성격이 강했어요.  태수가 그런 고충을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지역은 머리띠가 아니라 어깨띠를 한다고. 그게 당시 그들의 정서인 거죠. 마치 캠페인 하듯이, 마치 선거운동 하듯이 어깨띠를 맸어요. 머리띠는 빨갱이들이 하는 거니까.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때 그들에겐 그걸 머리띠로 바꾸는 것도 엄청 큰일인 거예요. 그만큼 유화적이고 관변화되어 있었던 거죠. 그런 이들하고 밤새 이야기하고 설득해야 겨우 지부장 한두 명 꼬실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일을 지역에서부터 하면서 쭉쭉 올라와 마지막 서울에서 크게 한 방 때리는 거죠. 그날 하루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들하고 싸우면서 우리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인데, 나도 해보니까 데모하는 게 점점 재미있어지더라고요. 태수가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요.” (박경석)

 

제주에서 서울까지 양쪽에 목발을 짚은 채 정태수는 걷고 또 걸었다. 손가락엔 물집이 잡히고 발바닥이 부르트고 허물이 벗겨졌지만,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났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 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1,500명의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만났다. 노점 자리 하나를 얻기 위해 이슬을 맞으며 밤새 그 자리를 지켜야 했듯이, 한 사람을 거리에 세우기 위해 그는 밤새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루어낼 도리가 없는 일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조직’이다. 그런 면에서 조직이란 농사일처럼 정직한 일이다. 한 사람을 바꾸지 않으면서 온 세상을 바꾸어낼 도리 같은 건 없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하소연을 늘어놓던 이들이 하나둘씩 거리에 서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었다. 한 사람이 거리에 선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그것은 억압받던 한 인간이 복종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일인 것이다.


▷  ④부 양 목발에 기대어, 사람에 기대어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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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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