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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④] 양 목발에 기대어, 사람에 기대어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진보적 장애인운동 조직 활동가 정태수 열사 약전(略傳) ④
등록일 [ 2019년12월06일 13시41분 ]

▷ ③부 살아남은 자, 조직하라

 

- 생활의 전선에서(1997~2001년)

 

한편 1994년 스물여덟 살의 정태수는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 노래패 ‘노둣돌’에서 활동했던 김영희를 만나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김영희는 대학 노래패에서 노래하며 학생운동을 하던 소아마비 장애 여성이었는데 정태수와 같은 제주 출신이었다. 하지만 정태수의 장애가 중증인 데다 장애인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김영희의 가족은 둘의 교제를 반대하고 나섰다. 김영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갓 취업을 했던 1995년 봄 즈음부터는 제주에 있던 가족이 서울로 쫓아와 그의 자취방을 점거하다시피 하여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이 시기 정태수 역시 노점 투쟁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었다. 정태수는 국가와 경찰로부터 김영희는 가부장제와 가족으로부터 도망쳐야 했으므로 두 사람은 함께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차를 타고 전국을 돌았는데 이때에도 전장협의 지역 지부들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2~3개월간 지속되던 도피생활은 1995년 9월, 정태수의 구속으로 끝났다. 정태수의 석방 후 김영희는 가족과 선을 긋고 정태수와 동거를 시작했고 1996년 딸 세린을 낳았다. 1997년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지만 김영희의 가족은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였다. 

 

배우자 김영희 씨와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어느 날 태수가 몇 년만 돈을 벌겠습니다, 가게 하나 차려서 부인한테 맡기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말했었다. 태수의 동기들도 비슷한 상황으로 활동을 정리했다. 결혼과 동시에 조직 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반복되었다.” (김대성)

 

전장협은 활동가들에게 활동비를 제대로 주지 못했고, 청년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활동해왔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상황은 달라졌다. 정태수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활동을 쉬고 김영희와 함께 딸을 키우며 인쇄소와 식당(족발집)을 운영했다.

 

이 시기 전장협은 큰 지각변동을 겪는다. 1990년대 중반 장애인 관련 단체가 전반적으로 보수화하거나 시민운동 경향을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전장협은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재정적으로도 심각한 압박에 시달렸다. 1998년 전장협은 한국DPI에 흡수 통합되었다. DPI는 장애인문제를 의사나 재활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는 전문가주의를 배격하며 출범한 국제조직이었다. 두 조직의 통합과 이후 DPI의 행보는 후에 ‘노선의 전환’으로 평가되었다. 전장협이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을 통한 사회변혁적 관점을 견지했다면 DPI는 제도권 정치 세력 내에 장애인의 지분을 형성함으로써 장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새로운 길을 택한 것이다.(『차별에 저항하라』, 101쪽) 통합의 과정에서 정태수가 일구어 놓았던 장자추(노점분과), 지역 지부들과의 관계, 고용촉진걷기대회의 흐름과 성과들은 단절되었고 그와 뜻을 함께했던 여러 동료들도 전장협을 떠났다. 

 

“DPI하고 통합할 때 최O씨가 회장을 맡으면서 어느 날 회원을 정리하겠대요. 그러면서 장자추 회원은 다 잘라야겠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노점상이나 농민은 쁘띠 브르주아지여서 혁명의 시기가 되면 혁명에 반대해서 끝까지 저항한다는 거예요. 노점상은 생산 수단을 갖고 있는데, 노점 자리가 바로 그 생산수단이라고 했어요. 이론상으론 그게 맞다 하더라도 장애인 노점상은 다르지 않냐고 내가 그랬어요. 현대자동차에서 한 달에 300~400만 원 받는 비장애인 노동자하고 한 달에 60만 원 버는 장애인 노점상 중에 누가 더 민중이냐고 따졌는데, 그 사람은 말로 못 당해요, 끝내 아니래요. 그때 장자추 회원들, 전장협 투쟁의 기동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다 잘렸죠.” (김종환)

 

“최O씨는 전장협의 현장 조직들을 하나둘씩 끊어냈어요. '또바기'라는 대학생 자원활동가 조직이 있었는데 주로 장애인시설에 자원봉사를 다니면서 빨래해주고 공부를 도와주는 활동을 했죠. 돈은 없어도 사람들 꼬셔서 이런저런 활동을 해보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는 또바기를 분리시켜 버려요. 가장 크게 박살 난 것이 노점분과였어요. 통합과정에서 전장협이 갖고 있던 얼마 되지 않던 대중 공간들을 싸그리 날려버렸어요. 그게 다 태수가 일구어놓았던 농사였어요. 통합은 현장의 저항을 조직해내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엘리트 중심, 정책 중심의 회원 조직으로 가고 있었죠.” (박경석)
 
- 복귀 그리고 마지막 조직 사업이 된 장애인청년학교(2001~2002년)

 

성격 좋고 성실했던 그에게도 장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쇄소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식당을 하나 더 차린 것이 화근이었다. 인쇄소에서 번 돈이 고스란히 식당의 적자를 메우는 데 들어갔고 그것도 부족해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남는 것이 없었고 장애인운동 현장에 대한 갈증은 더욱 깊어져갔다. 2001년 정태수는 자신이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활동을 쉬는 동안 태수는 장애운동 현장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토로했었다. 그가 전국적으로 조직해서 만든 성과들을 제대로 관리할 주체가 보이지 않고 위축되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까워했다. 어느 날 거래처를 가려고 을지로를 지나가는데 마침 도로를 점거하고 집회하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자신이 집회를 기획하고 주도했었는데 이제 그것을 구경하는 시민이 되었구나, 착잡한 마음에 소주 한잔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한숨지었던 기억이 있다.” (이상호)

 

“서울DPI 대표였던 최O씨가 탄핵되다시피 그만두고 활동가들도 많이 그만뒀어요. 당시 우리는 전장협 운동의 계보를 잇는 단체를 DPI라고 생각했어요. 전장협이 DPI와 통합했고 거기에 우리의 동지들이 다 있었으니까. 나중엔 그 계보가 장애인이동권연대로 바뀌었지만 그땐 이동권연대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내가 태수를 만나서 DPI가 큰일 났다, 우리가 들어가서 바꿔보자고 했죠. 김대성 선배를 찾아가서 회장을 맡아달라고 하고 나, 태수, 상호가 DPI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교육 사업으로 장애인청년학교를 만들고 태수가 주도했어요.” (김종환)

 

“복귀를 결심하면서 정태수에게는 몇 가지 전망이 있었다. 사회복지법인을 건설해서 대중사업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 중증장애인 중심의 자조조직을 결성하는 것, 장애인 정치연수원을 건립하는 것 등이었다. 후배들을 만나도 장애운동에 대한 걱정과 우려밖에 없었다. 활동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실을 보면서 많이 아파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후배들 20~30명씩 불러놓고 없는 돈에 30~40만 원씩 써가면서 소주를 사주며 격려했다.” (이상호)

 

정태수 열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장애인청년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현장에 복귀한 후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일은 이번에도 사람들을 만나고 조직하는 일, ‘장애인청년학교’였다. 청년학교는 장애인문제에 관심 있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대중 강좌였다. 장애인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인권운동이나 사회운동과의 접목을 시도했는데 당시로선 매우 신선한 기획이었다. 이러한 대중강좌를 통해 청년들이 부담 없이 친숙하게 만나 장애인 문제를 고민하고 토론하는 장을 만들고자 했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청년 활동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19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를 진행했을 때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투쟁과 실천 속에서 깨우친 활동가들을 장애인청년학교 같은 교육을 통해 이론적으로 무장시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김대성)

 

“전장협 시기 장애인아카데미라는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때 한신대 남구현 교수님이 독일에서 공부하고 처음 돌아왔을 때였어요. 그 강의를 듣고 내가 정말 놀래자빠졌어요. 사회복지를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그전까지 한국의 사회복지는 죽지 않을 만큼 해주는 거였는데 그걸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복지를 당당한 권리로 진보적으로 해석하더라고요. 장애인청년학교에도 남 교수님의 강의를 당연히 넣었죠.” (김종환)

 

청년학교를 준비하던 정태수의 모습은 생기 넘치고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남들보다 먼저 나섰고,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충돌하면 조정자 역할을 자처했다. 가만히 앉아 수강생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을 만나기 위해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모임을 찾아다녔고, 강사들을 만나 강의 내용을 미리 조율했다. 수강생들의 출석 상황을 점검하거나 중증장애인을 위한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일, 모꼬지 준비 같은 실무들도 거의 대부분 그가 맡았다. 돌아온 정태수의 추진력과 성실함이 빛났던 장애인청년학교는 정태수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애인문제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일을 통해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찾은 정태수는 피노키오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사무국장으로, 서울DPI의 사무처장으로 임명되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현장에서 그의 활동은 1년을 채 가지 못했다. 2001년 12월에 시작해 2002년 3월 2일 막을 내린 장애인청년학교의 마지막 날, 수료식을 겸한 모꼬지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것이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장애인 청년학교’ 모꼬지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마당에서 노래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뒤풀이를 했는데, 태수가 그날따라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면서 무리를 하더라고요. 태수는 술을 잘 못 먹어요. 12시쯤 됐을 때 태수가 몸이 안 좋다면서 쉬겠다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30분쯤 있으니까 누가 태수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가봤더니 태수 몸이 차갑다면서 사람들이 막 풀어주고 있었어요. 그렇게 20분쯤 지나니까 체온이 돌아왔어요. 그때 병원에 갔었어야 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갈지는 꿈에도 몰랐죠. (…) 두시쯤 됐는데 누가 또 태수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그땐 이미 숨을 안 쉬고 있었어요. 굉장히 위독한 상황이었어요. 구급차 불러서 가까운 병원으로 갔는데 새벽이니까 레지던트 같은 사람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사람이 죽었는데, 뭐라도 해보라고 내가 소리를 막 쳤는데… 아무것도 안 하더라고…(울음)” (김종환)

 

“모꼬지 가기 며칠 전부터 태수형이 집에 새벽 두 시, 세시에 들어왔어요. 늦어도 12시엔 들어오던 사람인데. 전날도 늦게 왔는데 너무너무 피곤해 보였어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굳이 자기가 안 해도 될 일들을 하는 거 같더라고요. 뒤풀이한 후에 이 사람 저 사람 태워줬대. 당신도 피곤한데 뭐하는 거냐고 내가 잔소리를 했어요. 모꼬지 가는 날 아침까지도 내 마음이 안 좋은 상태였어요. 나는 괜히 창문 청소를 열심히 하면서 태수형한테 잘 다녀오란 말도 겨우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태수형이 죽었다는 걸 병원에 도착해서야 알았어요. 병원에 도착하니까 사람들이 응급실 바깥에 주르륵 서 있고 병실에 들어갔더니 경찰이 검시를 하고 있었어요.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 정신을 차리니까 이 사람은 죽었고 나는 이 사람과 인사 한마디도 못 나눈 게 갑자기 생각나더라고. 시댁 어르신들 오기 전에 봐야겠다고 해서 내려가 봤는데 태수형이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고요. (침묵, 눈시울 붉어짐)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는 세린이를 두고 가면서 얼마나 아팠을까. 태수형이 세린이를 되게 많이 아꼈거든요. 같이 많이 놀아주기도 하고. 또 하나는 온몸이 다 칼자국인 거야. 장애를 치료하느라 수술도 많이 했을 것이고 장애 때문에 넘어지고 다치는 사고도 수없이 많았겠지. 여기저기 찢어지고 꿰맨 자국이 너무 많은 거예요. 저렇게 힘들게 살았구나, 고생만 하다 가네… 살면서 그 상처를 봤을 텐데도 그날따라 그게 더 가슴 아프게 느껴지더라고요.”  (김영희)

 

딸 세린이와 함께.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그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과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들은 깊은 슬픔에 휩싸였다. 그를 장애인운동의 길로 이끌었던 박흥수가 2001년 가난과 외로움, 알코올 중독이라는 지독한 병마와 싸울 때 그를 돌보기 위해 병원을 알아보았던 정태수였다. 박흥수의 건강이 나아졌다며 기뻐하던 정태수였다. 결국 박흥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추모사업회를 만들자고 쫓아다니던 사람도 정태수였다. 그런 정태수가 이토록 급작스럽게 박흥수의 뒤를 따르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장례식장엔 새로운 계획에 들떠 의욕적으로 활동하던 정태수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3일 뒤 그는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랑했던 동지이자 배우자 김영희와 딸 세린의 집에는 정태수를 기억하고 그 가족의 슬픔을 위로하고 싶은 동료들의 발걸음이 1년 동안 끊이지 않았다.

 

“거의 혼을 놓고 살았죠. (…) 그런 나를 정태수의 동료들이 보다 못해서 허구한 날 찾아왔어요. 어떤 날은 서너 명, 어떤 날은 열 명, 365일을 그렇게 살았어요. 그럼 나는 그 사람들한테 술상 차려줬어요. 그 사람들이 말 걸어주면 대답하고. (…) 하나도 안 귀찮았어요. (…) 나는 정태수와 친밀한 사람은 마치 나와도 그런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오면 너무너무 반가웠어요. 처음 보는 사람이어도 자기를 누구라고 소개하면 나는 다 정태수의 수첩에서 보던 이름들이었어요. 아, 당신이 그 사람입니까? (웃음)” (김영희)

 

정태수는 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품어주던 사람이었다. 양 목발에 기대어 험난한 생애를 꿋꿋이 헤쳐 온 정태수는 누군가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의 힘을 믿으며 사람들에게 기대어 살아왔다. 언제나 현장에 있었고 투쟁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강물처럼 흘렀다. 그의 동료들은 2002년 9월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를 출범시켜 그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된 정태수 열사 묘역. 지난 2012년 3월 1일, 정태수 열사 10주기에 열사 묘역을 찾은 장애해방운동가들.

 

- 활동가, 정태수

 

“정태수의 정말 좋은 면은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몸으로 부딪쳐본다는 것.” (곽철주)

 

“어떤 일을 같이해도 믿을 수 있는 듬직한 선배였다. 후배들에게 많은 신뢰감을 주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떤 일을 열사와 같이하면 그 사업은 믿을 수 있었다.” (조영임)

 

“89년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을 위해 보름 동안 단식을 같이했을 때, 사람이 참 털털하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무슨 이야기를 하든 잘 녹아들었다. 어떤 유형의 장애인을 만나도 친화력을 갖고 다가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활동가 중 한 명이었다. 활동공간에 논쟁이 난무하고 일은 진행이 안 될 때 모두가 패배감에 젖어버리게 되는데, 그는 그런 속에서도 계속 사람을 만들어냈다. 집회 때마다 집회를 주도하고 앞장섰지만 그의 사진을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물밑에서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이상호)

 

“서울DPI 활동가들이 하나 같이 개성이 강하고 튀는 인물들이었는데 태수가 화합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 모두 다 포용할 수 있었다. 물론 단점도 있었지만 태수는 일당백의 역할을 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조직 활동가였다.” (김대성)

 

“그는 탁월한 조직가였다. 정치인이나 엘리트가 아니라 노동자, 노점상, 중증장애인 같은 밑바닥의 삶을 조직했고 그 목적은 거리에서 투쟁하는 것이었다. 태수는 그것이 장애인운동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박경석)
 
“그는 진짜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20대 초반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활동이 그가 운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했던 활동과 비슷하다. 사람들과 만나 고민을 얘기하면서 어떻게 해결할지 대화하는 것.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고민의 초점은 대중 공간 속에서의 운동이었다. 그가 영웅은 아니지만, 아주 모범적이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그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자기가 관계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친구에게서 배우고 싶은 점은 그가 최선을 다해 자신이 가진 희망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석구)

 

 

2012년 3월 1일,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정태수 열사 10주기 기념토론회.

 

[후기]

 

정태수는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었던 장애인을 투쟁의 주체로 조직하여 거리에 세운 진보적 장애인운동 활동가였다.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든 사람이기도 한 그는 내가 처음 노들야학 교사가 되었을 무렵인 2002년 세상을 떠났다. 생전의 그를 만난 적이 없지만 그는 나에게 익숙한 존재였다. 매해 나는 그의 추모제에 참석했다. 3월 1일에 열리는 정태수 열사의 추모제는 나에게 봄의 시작, 한 해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였다. 행사장엔 커다란 현수막이 양쪽으로 걸려 있었는데 하나엔 그의 얼굴이 있었고 하나엔 그의 정신을 나타내는 구호 ‘조직하라’가 적혀 있었다.


추모제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오전엔 마석 그의 묘소를 참배했고 오후엔 추모사업회의 총회와 추모제가 열렸으며 저녁엔 뒤풀이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옛 동지들은 악수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 행사장을 우르르 몰려다니며 뛰어놀았다. 2003년 시작된 추모제가 17회를 거듭하는 사이 꼬마들은 대학과 군대에 갔고 정태수의 동료들은 그만큼 나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한 해 동안 가장 뜨겁게 현장을 지킨 활동가들이 ‘정태수상’을 받았다. 그것은 흡사 어느 대가족의 명절 풍경 같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장애계 어디에서도 그런 풍경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새삼스럽게 그것이 정태수의 빈자리였음을, 그를 사랑했던 동지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음을 알았다.

 

정태수 열사의 생애를 복원하는 일은 마치 완성되어 있던 레고 작품을 해체한 뒤 다시 조립하는 일 같았다. 나는 그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작품을 해체한 후 내 앞에 어지럽게 흩어진 낱낱의 조각들을 보며 매일매일 울고 싶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거대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떤 조각은 생각보다 너무 작거나 컸고 어떤 조각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노점 투쟁 같은 것이 그랬다. 장애인운동의 한 영역에 노점할 권리가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고 장애인 활동가들이 조직의 확대와 생계 대책으로 실제로 노점을 했다는 것은 여전히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들 중 한 명이 노점 철거에 맞서 싸우다 살해되었다는 것도, 경찰 1,000여 명이 영안실 벽을 부수고 들어와 그 시신을 탈취해 갔다는 것도, 시신이 내장이 다 들어내어 진 채로 돌아왔다는 것도, 그 시신을 붙들고 몇 개월 동안 싸웠다는 것도 여전히 믿기 어렵다.


그의 생애를 횡으로 종으로 조직하며 여러 열사들을 만났다. 1984년 휠체어를 탔던 지체장애인 김순석은 거리에 턱을 없애 달라는 유서를 쓰고 자결했고, 1995년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은 철거에 맞서 저항하던 어느 날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2002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수급자 최옥란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싸우다 음독을 시도했다.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왼쪽엔 정태수의 얼굴이 있고 오른쪽엔 ‘조직하라’라는 구호가 걸린 그 자리 말이다. 정태수가 떠난 자리는 내가 장애인운동을 시작한 자리이기도 하다. 2002년 나에게 혁명처럼 닥쳐온 그 세상이 실은 아주 느리고 치열하게 조직되어 온 거대한 우주였음을 그의 삶이 말해주었다. 아주 긴 시간여행을 하고 돌아온 기분이다.


○ 참고자료
『차별에 저항하라』, 김도현, 박종철 출판사, 2007
정태수열사 추모자료집, 정태수열사 추모사업회, 2002
장애해방열사 단 (http://cafe.daum.net/sadddan)

 

○ 자문
강영자(정태수 열사 어머니)
김영희(일과 노래, 정태수 열사 배우자)
박경석(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김종환(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그 외 인용된 구술은 모두 ‘정태수열사 추모자료집(2002)’에서 가져왔습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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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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