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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⑥] 그날, 이후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김영희 인터뷰] 김영희와 정태수의 사랑과 투쟁 ②
등록일 [ 2019년12월11일 00시51분 ]

▷ 전편 : 사랑의 야반도주

 

(기록자인 홍은전은 ‘홍’으로 구술자인 김영희는 ‘김’으로 표기했다.)

 

생활의 전선

 

홍: 5년 정도 인쇄소와 족발집을 운영하셨다고 들었어요. 정태수 열사는 이십 대 초반부터 운동에 대한 방향이나 의지가 확고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왜 꺾이게 됐어요?


김: 꺾였다기보다는 상황이 그렇게 된 거야. 내가 만삭일 때 태수형이 친구 병문안 가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을 했어. 만삭의 몸으로 내가 태수형 병간호를 했어. 내가 애 낳을 때도 깁스를 하고 있었다니까. 그러니 활동을 할 수가 없었던 거지. 전장협에서 조직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병원으로 박경석(현 노들야학 교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을 불렀어. 내가 상황이 이러하니 당신이 그걸 맡아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 역할을 경석이형이 맡게 된 거야.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홍: 그 길로 휴직을 한 거예요?


김: 응. 애 낳고 키워야 되니까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인쇄소를 시작한 거지. 친구 중에 한 명이 인쇄소를 해서 노하우가 있었어, 그걸 배워가면서 한 거지. 동네 원청기획사 같은 거. 편집도 하고 기계도 돌리고 명함도 찍고. 조그마한 방이 하나 딸려 있어서 애를 데리고 나와서 거기 눕혀놓고 우리는 일하면서 키웠지. 한 5년 가까이 했나 봐. 중간에 족발집도 했어. 인쇄소는 내가 맡고 족발집은 태수형이 맡고. 태수형이 10억을 모아서 장애인 정치연수원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거든.(웃음) 그런데 족발집이 워낙 홍보경쟁이 심했어. 매출의 반은 홍보비로 나가. 인쇄소에서 돈 좀 벌어서 족발집 적자 메우느라 다 썼어.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엔 내가 알바까지 해가며 빚을 청산해야 했어. 삼중고에 시달렸어, 인쇄소 일해, 알바 뛰어, 족발집 가서 가끔 고기도 썰어.(웃음)


홍: 언니가 생활력이 되게 좋았네요.


김: 20대니까 가능했지. 일주일에 반은 밤을 새웠어. 인쇄소 일이 쉽지가 않아. 고객들의 스케줄에 맞춰줘야 하니까 밤새도록 편집 디자인하고, 을지로 인쇄소들이 새벽 6시에 문을 열면 첫판으로 필름을 걸어줘야 되니까 새벽 5시에 나가는 거야. 그리고 돌아오면 낮엔 또 일하다가 밤이 되어야 퇴근해.


홍: 돈은 좀 벌었어요?


김: 못 벌었어. 생활을 유지할 정도이지 모으는 건 불가능해. 그러다 2001년에 태수형이 운동 현장에 대한 갈증이 해소가 안 되니까 아무래도 자기는 그쪽으로 가야겠다고 하더라고. 알겠다고 했지. 애가 다섯 살이라 한창 클 나이니까 나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는 거야. 인쇄소는 사촌동생한테 넘기고 태수형은 복귀하고 나는 아이 키웠지. 그 당시 내 고민은, 나는 정말 부모 도움 안 받으면서 살고 싶었는데 그게 전혀 해결이 되지 않는 거야. 당시 활동가들은 활동비도 못 받았거든. 출장 가야 하면 돈 있는 선배한테 출장비 10만 원, 20만 원 받는 정도였지. 당신이 복귀하는 건 좋은데 재정적인 대책 없이 그러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내가 얘기했어. 단체들이 후원시스템도 없었으니까 운영비가 없잖아. 돈 있는 선배들한테 돈을 받으면 그 선배들 뜻에 따라야 하잖아. 나는 그 점에 대한 문제의식이 되게 컸어. 재정 조달에 대한 대책을 세우면서 활동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형이 나한테 얼마 정도 있어야 우리의 생활이 가능할까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내가 계산기를 두드렸지. 당신이 활동비로 한 80만 원 정도 확보하고 내가 부업을 뛰어서 그 정도 확보하면 생활은 유지할 수 있겠다고 했던 기억이 나. 어떻게 다시 복귀할까 고민하던 차에 DPI에서 사람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고 와서 거들어달라고 하면서 맞물려 들어갔어. 당시엔 제대로 굴러가는 단체도 별로 없었어.
 
홍: 복귀하고 나서 정태수 열사는 좋아했어요?


김: 그럼, 좋아했지! 열심히 했어. 태수형이 기획했던 장애인청년학교라는 프로그램이 당시로써는 신선했어. 장애인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서 부문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좋은 기획이었어. 사회운동과 접목시켜서 넓고 깊게 배울 수 있도록 남구현 교수, 이덕우 변호사 같은 분들을 섭외하더라고. 나는 옆에서 태수형이 준비하는 걸 듣기도 하고 태수형이 메모해놓은 거 보면서 아, 이런 사람들을 섭외하고 있구나, 생각했지. 괜찮은 것 같더라고. 나중에 태수형 죽은 후에 어디 가면 자기가 장애인청년학교 1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어. 조현수, 정동은 이런 비장애인 활동가들. 장애인청년학교는 그런 데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통로였던 것 같아.


홍: 피노키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을 하셨다는 건 처음 알았어요.


김: 어느 날 태수형이 이젠 장애인운동을 중증장애인 중심으로 풀어야겠다고 하더라고. 경증장애인은 각자 먹고사느라고 뿔뿔이 흩어졌고 이동권투쟁이 막 시작되면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중증장애인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지. 2001년 이동권투쟁과 맞물려서 장애인 자립생활이라는 패러다임이 화두가 됐잖아. 정립회관 자립생활 지원팀이 만들어지면서 시범적으로 피노키오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들었는데 조직 운영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까 태수형이 지원을 했던 거야.

 

정태수 열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장애인청년학교’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그날

 

홍: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으세요?


김: 난 태수형이 죽은 줄을 몰랐어. 병원 도착해서 내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 거지. 종환이형한테 연락은 받았는데 아파서 구급차 타고 병원 가는 중이니까 그리로 와라, 그렇게만 얘기했거든.


홍: 그전에도 심장이 안 좋단 건 알고 있었어요?


김: 아니. 한 번은 숨을 못 쉬겠다고 해서 병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특별히 어떤 진단을 받진 않았어. 그래서 그날도 심장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안 했지. 사실은 태수형이 엠티 가기 며칠 전부터 새벽 두 시, 세시 이렇게 들어오는 거야. 늦어도 12시엔 들어오던 사람인데 연락도 없이 자꾸 늦고 나는 늘 형이 올 때까지 기다려. 그날도 늦게 왔는데 너무너무 피곤해 보였어. 얘기를 들어보니까 굳이 자기가 안 해도 되는 일들을 하는 거 같은 거야. 뒤풀이한 후에 이 사람 저 사람 태워주느라 늦게 왔더라고. 내가 잔소리를 했지. 당신도 피곤한데 뭐하는 거냐고. 내 마음이 안 좋은 상태였어. 엠티 가는 날도 나보고 같이 가잔 소리를 안 하더라고. 보통 때 같으면 같이 가자고 했을 자리였거든. 그런데 아무 얘기도 안 해. 나는 좀 삐져 있었지. 아침부터 괜히 창문을 아주 열심히 닦았어. 잘 다녀오란 말도 겨우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안 나. 그렇게 마음이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를 보냈어.


그러다 새벽 두 시, 세 시쯤에 종환이형한테서 연락이 왔어. 태수형이 안 좋으니까 빨리 오래. 빨리 가려고 했는데 방법이 있어야지. 그때 하남시 살았는데, 다섯 살짜리 자는 애를 들쳐 업고 나가서 택시를 잡을 엄두가 안 나는 거야. 시누이한테 전화해서 와서 애를 봐 달라 했는데 자기네도 같이 가겠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래, 그 조금만이 두 시간 세 시간이 됐어, 나는 애가 타서 죽겠는데. 시누이가 새벽 네 시인가 넘어와서 그 집 차로 같이 갔어. 병원에 도착하니까 다들 응급실 밖에 주르륵 서 있었어. 들어갔더니 경찰이 검시를 하고 있는 거야.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일단 시댁에 전화해서 빨리 와달라고 하고. 정신을 퍼뜩 차리고 나니까 이 사람은 죽었고, 나는 이 사람과 인사 한마디도 못 나눈 게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고. 검시할 때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래서 이 사람을 봐야 되겠다고, 시댁 어르신들 오기 전에 봐야 되겠다고 해서 안치소에 내려가 봤는데… 태수형이 눈물을 (눈에서부터 코 옆까지 선을 그으며) 이만큼 흘리고 있더라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너무 마음이 아픈 건… (침묵, 눈시울이 붉어짐)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 세린이(딸)를 두고 가면서 얼마나 아팠을까. 태수형이 세린이를 되게 많이 아꼈거든, 같이 많이 놀아주기도 하고. 그런 애를 두고 가면서 얼마나 아팠을까. 또 하나는… 온몸이 다 칼자국인 거야. 수술 자국이 너무 많은 거야. 여기저기 찢어지고 꿰맨 자국. 장애를 치료하느라 그랬을 것이고 장애 때문에 넘어지고 사고 나서 다치는 일도 수없이 많았겠지. 아휴, 저러고 살다 가냐. 저렇게 힘들게 살았구나, 고생만 하다 가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살면서 봤겠지, 그런데 그날따라 그게 더 가슴 아프게 느껴지더라고.

 

홍: 생각해보면 언니는 정태수 ‘열사’의 배우자로 훨씬 더 오래 불렸네요. 실제로 정태수의 연인, 배우자로 산 건 되게 짧아요. 언니 인생에 7년, 8년이니까.


김: 그렇지.


홍: 짧지만 굉장히 강렬하고 밀도가 높았던 시간이네요. 야반도주에, 도피에, 구속에, 부모 반대에, 결혼하고선 장사하고, 아이도 낳아서 키우고.


김: 응, 뭔가가 아주 많았어. 30대, 40대를 지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지금 나한테 그렇게 살라고 하면 때려죽여도 그렇게 못해. 누구한테 그런 삶에 인생을 걸라고 하면 “미쳤어?” 그러겠지, 못 걸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태수형 죽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가 저 사람을 많이 사랑했었다는 게 더 느껴지는 거야. 그전에는 그냥 편하고 좋은 사람, 그런 마음만 갖고 살았는데.

 

정태수 열사가 딸 세린이 우유를 먹이고 있다.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정태수의 수첩

 

홍: 그 후 1년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김: 거의 혼을 놓고 살았지. 아무런 생각도 없고 뭔가를 먹어야겠다거나 하는 것도 없고. 유일한 목표는 아침에 일어나서 저 아이를 밥을 먹여서 유치원에 보내는 거, 그것만은 내가 놓치지 않겠다고 했지. 나머지는 동생이 해줬어. 내 동생이 그날부터 우리 집에 들어와 살았거든. 그런 나를 정태수의 동료들이 보다 못해서 1년 동안 허구한 날 찾아왔어. 그럼 나는 뭐 했는지 알아? 그 사람들한테 술상 차려줬어. 그 사람들이 말 걸어주면 대답하고. 어떤 날은 서너 명 오고 어떤 날은 열 명이 왔어. 365일을 그렇게 살았어.


홍: 내가 만약 그런 상황일 때 누가 자꾸 찾아오면 더 힘들 것 같은데, 언니는 어땠어요? 고마운가요? 귀찮지 않나요? 안 그래도 힘든데.


김: 아니, 하나도 안 귀찮았어. 태수형이 살아있을 때도 잘 못 만났던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어. 태수형 도피생활 할 때 돈을 조금 줬던 사람이었는데 그분이 태수형 죽고 나서 집으로 찾아왔더라고. 나는 정태수와 친밀한 사람은 마치 나와도 그런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아. 오면 너무너무 반가웠어. 처음 보는 사람이어도 자기를 누구라고 소개하면 나는 다 정태수의 수첩에서 보던 이름들이었어. 아, 당신이 그 사람입니까?(웃음)


홍: 죽고 난 뒤에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아온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신기하네요. 동료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 봐요. “영희가 힘드니까 우리 자주 가봅시다.” 누군가는 장부 만들어서 당번 짰을지도 몰라요.


김: 맞아, 했을 거야.(웃음)


홍: “어젠 내가 갔는데 내일은 누가 갈래?” 마치 구속된 사람 면회 조직하듯이.


김: 당시에 같이 활동했던 동료 상호형이 태수형과 형제처럼 각별했어. 그 부부가 연애할 때부터 우리랑 아주 친하게 지냈거든. 태수형 죽었을 때 상호형 부인이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몇 달 동안 그 부부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살았어. 배 속에 아이도 중요하지만 내가 불안하니까 챙겨주고 싶었던 거겠지.


홍: 와… 대단하네요. 정태수열사가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요.

 

김: 한 1년쯤 되니까 사람들이 뜸해지고 내 시간이 많이 생기잖아. 그때부터 정말로 총 맞은 것 같더라고, 노래 가사처럼, 어느 순간 내 가슴에 누가 총을 쏜 것처럼 아픈 거야. 1년 동안은 혼이 나가서 아픈지도 모르고 살았던 거야. 그 당시엔 종환이형한테 나 죽으면 우리 딸 잘 부탁한다는 얘기까지 했으니까. 제정신이 아니었다가 정신이 돌아오니까 뭐라도 의미를 붙들어야 했어. 그렇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았어. 이래저래 생각을 하다 보니까 어떤 기억이 딱 떠오르더라고. 태수형이 복귀해서 장애인자립생활 운동을 풀어가다 보니까 사회복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 어느 날 나한테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꼭 따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언젠가는 나한테 같이 하자고 할 생각이었던 것 같아.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는 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야. 일단은 대학도 가야 되고, 그 공부를 해내야 되니까, 공부하던 근력이 없으면 쉽지가 않거든. 나보고 그걸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땐 그냥 듣고 넘겼었지. 그 기억이 떠오르면서 사회복지공부를 시작했어. 애 키우면서 3년 동안 온라인으로 공부했지. 장애인운동 안에서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주변에서 취직자리를 제안해준 사람들이 있었는데 장애인운동 쪽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었어. 사회복지 실습을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했고 그때 경석이형이 노들에서 활동해보자고 제안해서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을 했지.
 

2014년 3월 1일, 정태수열사 12주기 추모제에서 김영희 씨가 발언하고 있다.

그도 원했을 삶

 

홍: 언제 제일 많이 생각났어요?


김: 일상을 나누는 거지. 세린이를 같이 키웠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그걸 공유하지 못하는 것. 그게 제일 크지. 그도 원했을 텐데.


홍: 세린에게는 아빠에 대한 어떤 기억이 남아 있나요?


김: 안 그래도 오늘 인터뷰 오기 전에 세린이한테 이런 질문이 있다고 하면서 물어봤는데 기억이 없대. 이상해. 아빠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아빠 없는 빈자리를 최대한 남겨주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에 내가 되게 신경 쓰면서 살긴 했어. 근데 한편으론 5년을 저를 키웠는데 경험이든 감정이든 그런 게 없다는 게 서운하면서도 좀 아픈 거야. 사진으로 박제되어 있으니까 얘도 사진 보면 내가 이때 이랬구나, 아빠가 이때 이랬구나, 하는데도 기억은 없대. 참 신기하지. 나는 돌 즈음에 (소아마비에 걸려서) 침 맞으러 다녔던 것도 다 기억나는데. 아장아장 짚고 걷기 시작할 무렵에, 그 집안의 분위기, 내가 기어갔던 장면 이미지가 남아있거든. 그런데 우리 딸이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게 사실 잘 이해가 안 돼.

 

홍: 마지막 질문이에요. 활동가로서 정태수의 단점은 무엇이 있었나요?


김: 글을 잘 못 쓴다는 것.(웃음) 생각과 아이디어는 많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서는 잘 푸는데 글 쓰는 능력이 없었어. 그 능력이 있었다면 힘을 더 받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어. 그 외에 활동가로서의 단점은… 난 잘 못 느꼈어. 되게 열심히 하고, 정이 많고 사람을 잘 품어줬어, 아주 끈끈하게. 장례식에 너무 많은 사람이 와서 되게 놀랐어. 내 기억으론 2천 명이 넘게 왔던 것 같아. 손님들 앉을 자리가 모자라서 한 칸씩 한 칸씩 빈소를 늘려가면서 했어. 내가 인쇄소 운영하고 아이 키우느라 한동안 장애계 사람들을 못 봤을 때였는데 인상적이었던 게 그전에는 못 보던 중증장애인들이 많이 왔더라고. 물갈이가 되고 있었던 시기 같아. 아, 정태수가 이 사람들과도 무언가를 했었구나, 하는 마음에 그때 왔던 중증장애인들을 내가 잊지도 않아, 되게 친밀하게 느껴졌어.


홍: 그럼 배우자로서 단점은요?


김: 별로 없었는데… 음, 너무 절약하는 거? 나는 이 사람이 사회적 역할이라는 게 있으니까 옷 하나라도 잘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태수형은 자기 옷 사오면 낭비한다고 생각해서 못 사게 하더라고. 다리에 보조기를 차고 있어서 보조기의 날카로운 쇠에 옷이 자꾸 걸리니까 빵꾸가 잘 났거든. 그게 보기 싫어서 새것을 사주는데도 태수형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더라고. 그런 거 빼곤 특별히 없었어. 음,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좀 어린 측면은 있었지. 시댁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려워할 때 어른스럽게 커버해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그런 건 잘 못 하더라고.(웃음) 우리 집안의 반대가 워낙 심하긴 했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들은 안 그러잖아. 장인, 장모한테 찾아가서 넉살 좋게 인사하고 그러잖아. 그런데 태수형은 처가에 제대로 인사한 적이 없어. 쫄았겠지. 두려움이 있었겠지. 그런 자신감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홍: 그럼 세린이는 외할머니를 처음 언제 봤어요?


김: 태수 형 죽고 나서 장례식에서였던 거 같아. 외가 친인척은 거의 못 왔어. 오겠다는 사람들도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꼴도 보기 싫다고. 왜 이제 와서 보겠다고 하느냐고. 그런데 부모는 내치지 못하겠더라고. 엄마만 왔어. 우리 아버진 그런 거 못 하는 사람이야. 그래도 마음이 좋진 않아서 말이 좋게 나오진 않더라고. 자기 자식과 사위를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한 부모에 대한 원망이 있어서 엄마한테 되게 틱틱댔어. 그때 세린이도 처음 본 것 같아.
홍: 정말 드라마네요.


*   *   *   *   *   *   *


인터뷰를 정리하기 위해 여러 차례 영희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는 동안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이 내용을 정태수의 약전 속에 포함할 수 없었던 이유가 비단 이 이야기의 강력한 색깔, 혹은 장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나는 영희로부터 두 사람의 사랑과 투쟁에 대해 들으면 그것이 정태수의 사랑과 투쟁도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태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독립적이고 생활력이 강한 김영희라는 여성의 사랑과 투쟁인 것이다. 멋있다. 태수 말고 영희가. 영희는 태수를 만나 급격히 인생의 항로를 변경했고 변경된 항로를 씩씩하게 살았다. 인간은 타인과 ‘함께 겪은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 결국은 자기 자신이 선 자리에서 보고 겪은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것은 결코 타인의 것과 같을 수 없다는 걸 영희의 이야기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란히 앉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주 앉는 것이고, 마주 앉은 두 사람에게 보이는 풍경은 엄연히 다를 테니까. 그래서 나는 다시 궁금해졌다. 태수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바뀔까. 끝내 들을 수 없는 그 이야기가 정말로 궁금해졌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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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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