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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⑦] 태수야, 네가 옳았다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정태수의 친구이자 동지, 박경석 인터뷰 ①
등록일 [ 2019년12월13일 19시42분 ]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① 김순석(1952~1984.9.19) 장애인 이동권 등에 항의하며 유서 남기고 자결 _ 정창조
② 최정환(1958~1995.3.21)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 _ 강혜민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④ 박흥수(1958~2001.7.2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정창조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1] 진보적 장애인운동 조직 활동가 정태수 열사 약전(略傳)
[2] 정태수의 동지이자 배우자 김영희 인터뷰
[3] 정태수의 친구이자 동지 박경석 인터뷰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정태수는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박경석의 (7살 어린) 친구였다. 생전의 그를 만난 적 없는 나에게 정태수에 대한 인상은 그의 장례식에서 눈과 코가 빨개져서 울던 경석의 슬픈 얼굴과 경석이 술에 취해 부르던 태수의 18번곡 ‘의연한 산하’였다. 경석은 자신의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태수’로부터 시작했다. 장애해방열사들의 목록을 앞에 두고 여러 필진들이 모여 첫 회의를 하던 날, 정태수 열사의 업적(?)에는 정말로 이것이 있었다.


‘박경석을 물들였다.’


내가 여러 열사 중 정태수 열사를 기록해보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박경석이라는 사람이 장애인 운동 안에서 갖는 대체 불가능한 어떤 위치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였던 나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선 노들야학이 필요하고 노들야학을 설명하기 위해선 박경석이 필요하고 박경석을 설명하려면 정태수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것도 사심 가득한 인터뷰다. 나는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물들이고 물들여져 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정태수식으로 표현하자면 ‘조직한다’는 일일 테니까.


(구술자 박경석은 ‘박’으로, 기록자 홍은전은 ‘홍’으로 표기한다. 홍은전은 박경석을 평소처럼 ‘교장선생님(실제 발음은 교장쌤)’이라고 불렀다. 격식을 차린 호칭이 아니라 애칭에 가깝다.)


*    *    *    *    *    *    *


홍: 정태수 열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세요?


박: 1988년 3월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전산과 입학식 날. 고등학교 갓 졸업해서 머리도 짧고 목발을 딱 짚은 뚱뚱한 놈이 나타났지. 컴퓨터과 동기가 8명이었는데 뇌성마비 장애인 셋, 소아마비 장애인 넷, 그리고 척수장애인 나 이렇게 있었어.


홍: 교장샘이 장애인을 처음 봤다는 게 그날이구나.

 

1989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이 동문회 ‘싹틈’ 소식지 내용을 문제 삼아 소식지를 압수해가자 사람들이 복지관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맨 뒤에 하얀 머리띠를 하고 휠체어 탄 사람이 박경석, 보라색 남방 입은 사람이 박흥수 열사, 맨 앞에 머리를 빡빡 밀고 안경 쓴 사람이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박: 응. 신기했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 경증인데 당시엔 엄청나게 중증들이었어. 뇌성마비 장애인 중에는 대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애들도 있었고. 소아마비 장애인 중에서는 태수가 제일 중증이었고 나머지는 다 목발 없이 걸어 다녔어.

 

홍: 정태수 열사가 국민체조 거부 투쟁 모의했을 때 교장샘이 복지관 선생님한테 그 사실을 고자질하셨잖아요. 왜 그러신 거예요?


박: 길동에 모여서 술 먹는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런 모의가 시작된 거야. 나는 술 먹는 게 좋아서 쫓아다니다가 그런 모의를 들은 거지. 고자질한 게 아니라 선생님한테 ‘소통’해준 거야.


홍: 왜요? 굳이 그걸 알릴 필요는 없잖아요. 데모를 못 하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박: 그렇지. 선생님이 내 또래 장애인이었어. 화상장애였는데 서글서글하고 열심히 가르쳤어. 그런데 못된 애들이 뒤에서 그런 모의를 하니까 해병 특수수색대 나온 내가 그 선생이 얼마나 애처로워 보였겠어? 공로 하나 세우라고 알려준 거지. 그럼 실적이라도 올라갈지 어떻게 알아. 그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이 애들을 불러서 나쁜 애들하고 어울리지 마라, 하면서 못하게 한 거지. 성공했으면 열댓 명, 스무 명 정도 국민체조 안 하고 나왔어야 되는 건데 다 국민체조 하러 갔어. 정태수하고 두세 명 정도만 안 하고. 내가 혁혁한 공을 세웠지.(사악한 웃음)


홍: 정태수 열사가 화 안 냈어요?


박: 내가 태수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데 나한테 어떻게 화를 내? 못 내지. 대신 술 먹으러 갈 때 나를 빼놓고 가더라고. 그러니까 나는 또 얼마나 외로워…? (애처로운 얼굴)


홍: (대체 그게 무슨 마음이람.) 꼬발릴 땐 언제고 술은 또 같이 먹고 싶었어요?


박: 그럼! 다친 후에 난 친구도 없었어.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자리라곤 거기밖에 없었어. 그땐 돌아다닐 수단도 없었잖아. 술 먹는 데도 딱 정해져 있어, 길동 감자탕집. 맨날 수업 마치고 거기 모여서 술 먹는 거야. 이게 삶의 전부야. 복지관이 고덕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고덕동이 땅값이 비싼 곳이 되었는데 당시는 허허벌판이었어. 길동까지 술 먹으러 30분을 밀고 가야 해. 나는 휠체어 밀고, 태수는 목발 짚고 가는 거야. 마지막 버스정류장이 있던 곳에 술집이 있었어. 1년 내내 삶이라곤 복지관-술집-집이 전부이고 술집이라도 안 가면 복지관-집이 전부야. 갈 데가 거기밖에 없으니까 거기 안 끼워주면 힘든 거지. 그러니까 운동적으로 그들의 뜻에 동의하고, 내 행동을 회개한 건 아니지만 술을 먹기 위해서 다시 친하게 지낸 거지, 다 잊어버리자, 하면서. 


홍: 그분들이 끼워줬네요.


박: 국민체조 거부 투쟁이라고 하니까 말이 거창하지 그게 뭐, 혁명 같은 일도 아니잖아?!


홍: 그렇다고 굳이 고자질할 이유는 없죠. 사람이 의리라는 게 있는데.


박: 사실은 생각 자체가 달랐던 거지. 내가 장애를 입고 장애인복지관에 가서 직업훈련을 받겠다는 마음과 박흥수라는 사람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 올림픽 거부 투쟁을 하고 또 현장의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 우리한테 왔던 그 목적의식적인 마음이. 나는 그런 인식 자체가 없었어. 데모하는 건 나쁜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장애인이 어떻게 데모를 해? 죽어라 공부해도 취업이 될까 말까 하는데, 나쁜 길로 인도하려는 그런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믿어? 나는 평화주의자였어. 정말이야!

 

홍: 그 시절 정태수 열사의 성격은 어땠어요?


박: 태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이야기를 잘 들어줬어. 그런데 다른 사람들 이야긴 잘 들어주면서 나한텐 자기주장만 했어. 우씨. 그래서 많이 부딪쳤지. 우리 집하고 태수네 집 사이에 놀이터가 있고 거기 정자가 하나 있어. 거기서 세 시간을 싸운 적이 있어. 기억이 나는 건, 태수는 의사가 많은 돈을 받는 게 틀렸대. 나는 “그럼 너처럼 고등학교 겨우 나온 애가 의사하고 같은 월급을 받으려고 하느냐, 이 파렴치한 놈아” 그랬지. 우리 형이 의사였거든. 우리 형은 코피 흘리면서 공부하던데 너처럼 맨날 술 먹고 노는 놈이 어떻게 같은 월급을 받느냐고. 우리 집이 쫄딱 망해서 형이 돈을 많이 벌어야 우리 집을 먹여 살리는데. 그런데 태수가 어디서 마르크스 이런 거 듣고 와서는 나한테 써먹으려고 하니까 나도 질 수 없잖아. 그땐 태수가 이론도 튼튼하지 않아서 내가 이겼어. 굉장히 통쾌한 기분이었던 게 아직도 생각나. 태수가 더 공부해오겠다는 결심을 갖고 돌아가더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태수는 사회주의 국가 쿠바의 의사들 수준을 생각한 것이고 나는 자본주의 미국의 의사가 받는 대가를 생각한 것 같아. 능력주의지.

 

88년 장애자 고용 문제 토론회에 참여한 정태수 열사(가운데 안경 쓴 사람).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다른 길을 가다가 

 

박: 89년도에 직업훈련과정 졸업하고 이걸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대학을 가려고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지. 태수도 일정 정도는 나한테 동의가 되어서 대학은 가야겠다고 생각이 됐는지 나랑 같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정립회관 비리 문제가 터져서 농성이 시작되니까 거길 또 그렇게 쫓아다니더라고. 태수는 공부도 안 했어. 내가 1년만 참자 그랬는데. 학원비는 줬으니까 학원에 오긴 오는데, 1, 2교시 하고는 토껴버렸어. 태수는 대학에 떨어졌지. 그래서 91년에 나는 대학에 가고 태수는 본격적으로 조직운동을 시작했지.


홍: 교장샘, 개과천선하셨네요.(웃음)


박: 그럼! 나는 대학에 갔으니까 술친구가 많이 생겼지, 젊고 장애도 없는 친구들. 장애인들하고는 어디 가기도 힘들잖아. 길동에서만 술 먹던 나였는데. 차도 생겼어. 대학 합격하자마자 내가 차에 붙이는 작은 인형을 하나 사서 우리 어머니한테 그랬지. “어머니, 내가 차에 붙이는 인형을 샀으니까 어머니가 차를 사주시면 됩니다!” 91년 3월이 개학이니까 1월에 운전면허를 땄어. 어머니가 형제들한테 돈을 뜯어서 차를 사주셨지. 태수랑 학원 다닐 때는 제법 먼 거리였는데도 휠체어로 밀고 다녔어. 태수가 내 활동보조였어. 아파트 앞에서 둘이 만나서 학원까지, 태수가 나를 힘껏 밀어서 저만치 보내놓고 또 쫓아오고, 그렇게 학원 다녔어.


홍: 하하. 다정하네요.


박: 목발 짚은 애들이 빠르다는 걸 그때 알았어. 내가 힘껏 밀어도 태수 못 당해. 어느 날 똥이 급하다고 빨리 가는데, 와, 진짜 빠르더라고.(혼자 웃겨서 넘어감) 그랬던 내가 차가 생겼으니 날개를 단 거지. 91학번 동기들을 나의 활동보조로 다 조직한 거지. 학교에 편의시설 하나 없었어도 상감마마처럼 계단 아래서 5명이 대기하고 그랬어. 기말고사 보던 날 내가 늦게 오는 바람에 걔들이 나 기다리느라 다 늦었잖아. 나 도착하고 5층 강의실까지 순식간에 들어서 올라갔어. 걔네는 녹다운되어서 시험 다 망쳤다고 내 욕 실컷 하고, 내가 미안하다고 맛있는 거 사주고.


홍: 교장샘이 그렇게 캠퍼스를 누빌 때 정태수 열사는 뭘 했을까요?


박: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아래 장청) 활동하면서 노들야학을 만들었어. 그때 대학생들을 교사로 조직해달라고 나를 많이 찾아왔어. 그때 내가 교사로 꼬셨던 사람이 우리 과 1년 선배 안신연인데, 그는 한해 휴학해서 나랑 같이 공부했지. 그 선배가 야학 준비 단계부터 결합해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 나는 차가 있었으니까 그 친구 기사 노릇을 많이 했고 그렇게 야학을 기웃거리면서 사람들과 어울렸어. 94년에 그 친구가 야학하기 너무 힘들다, 당신 때문에 인생 조졌다고 술 먹고 울고불고했어. 내가 꼬셔서 야학을 하게 된 거니까 내 책임도 있고 힘들다고 하니까 애처롭기도 해서, “알았다. 나도 교사할게." 그렇게 된 거지. 그 친구를 낚았다가 도리어 내가 낚인 거지.

 

90년대 초중반, 정태수 열사가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에서 준비한 장애인사진전 ‘천국에는 계단이 없다’ 중 모델로 나선 박경석. 계단 끝에 휠체어를 탄 박경석이 있다.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그냥 사람

 

어느 날 흥수 형은 태수와 나를 불렀다. 우리 집 아파트 앞 정자였다. 돈이 없어 소주에 안주는 오징어 한 마리였다. 그리고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장애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강고한 조직을 건설하자고 제안했고, 그래서 우리 3명은 죽을 때까지 동지가 되자고 맹세했다. 장애인 세 명의 ‘정자결의’였다.


장애인운동에도 여러 출신들이 많은데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출신의 장애인들은 싹틈 동문회를 구성했고 그 당시 평생 장애인운동의 활동가로 결의한 사람은 3명이었다. 그들과 함께 외로운 길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별로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괜스레 ‘정자결의’ 때문에 인생이 질퍽하고 처절하게 된 것 같다. 그 이후로 선택의 연속이었다.


운동의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주 종목은 점거분야였다. 장애인복지관을 졸업한 해에 장애인훈련생의 기만적인 취업현실을 폭로하며 복지관을 점거하는 투쟁으로 화려한 점거가 시작되었다. 처음 점거를 결행했던 그날, 태수는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빡빡 밀고 나타났다. 장난이 아니었다. 충격이었다.


그 후 흥수 형과 태수는 치열하게 투쟁했다. 태수는 복지관 졸업 후 위장취업을 설파하며 구두수선 하는 미찌꼬바 형태의 작업장에서 장애인을 조직하였고, 흥수 형은 청계천에서 노점하는 장애인들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장애인운동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등을 만들며 가장 왼쪽에서 현장의 토대를 건설하고자 열심히 꼬라박았다. 장애인복지법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의 양대 법안 투쟁, 정립회관 시설 비리 투쟁, 최정환·이덕인 열사 투쟁, 장애인노동권쟁취투쟁 등의 과정에서 수많은 점거와 단식, 삭발, 그리고 도피와 감옥생활로 80년 후반과 90년을 관통하며 현장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온몸과 마음을 던졌다. 그리고 2000년으로 접어들며 흥수 형은 가난과 절망스런 현실 운동에 지쳐 술로, 태수는 투쟁의 과로로 젊은 나이에 죽어갔다.

 

정자결의를 했던 세 명의 동지 중에 나는 혼자 남았다. 그들과 함께했던 10년이 넘는 세월을 통해 나는 몸으로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 생겼다. 그리고 머리로 정리했다. ‘과격하지만 맞는 것 같았던’ 그 사실이 ‘맞다’라는 것이다. ‘운동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그 시대를 사는 민중들이 진실을 꿰뚫어 보고, 말하고, 힘을 모으기 위한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서 기능하는 데 있다’는 서준식 선생님의 생각이 맞다. 그들은 물리적 근거로 기능하는 장애인운동조직을 건설하려 했다. 그래서 가난하고 처절했고 고통스러웠다. 현란한 시대의 변화 속에 운동은 여의도에서의 로비로 전락되고 현장의 물리력은 그것을 치장하기 위한 기능으로 변질된 지금의 현실에서,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서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여전히 현장에서 빡세게 꼬라박는 것이 고통스럽고 외롭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길이었지만, 흥수 형과 태수가 내게 보여주려 했던 과격하고 물리적인 현장 투쟁들은 가슴이 빠개지도록 비참한 장애인들의 야만적인 현실에 대한 거부이며 불복종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비록 홀로 남았을지라도 그 길에 있음이 좋다. 그리고 내가 장애를 가졌을 때 느꼈던 무감각보다 고통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_ 정태수 열사 10주기 토론회 자료집(2012), 박경석

 

홍: 이 정자결의는 언제 하신 거예요?


박: 내가 대학 다닐 때(90년대 초중반)였던 거 같아. 흥수형이 되게 외로웠던 적이 있어. 흥수형은 소위 말하는 장애인운동의 본류가 아니거든. 울림터,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 장청 이런 주류 단체의 멤버가 아니라 빈민이었고 장애인한가족협회라는 여수애향병원에서 수술받은 소아마비 장애인들의 친목모임이 있었는데 거기 출신이었어. 태수는 장청 운동에 조직적으로 결합했고, 나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시기였는데, 외로웠던 흥수형이 우리를 불러서 싹틈 출신인 우리는 흩어지지 말자고 한 거지. 우리는 아무 출신도 아니었거든. 우리는 복지관 직업훈련소 출신이고 달랑 세 명이었으니까.

 

19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에서 정태수 열사와 박흥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홍: 그 두 사람은 교장샘한테 왜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박: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들이지.


홍: 그 사람들을 안 만났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예요?


박: 그렇지. 태수와 의사 월급 갖고 논쟁했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아. 그는 대체 뭘 봤기에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나는 그런 세계를 못 봤거든.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어? 내가 배운 세상은 그런 게 아니었어. 나는 군대도 갔다 왔고,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중소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나서 쫄딱 망했는데, 그땐 내 논리가 더 세서 태수를 이겼지만, 이제 갓 고등학교 졸업한 놈이 대체 뭘 봤기에….

 

홍: 박경석에게 정태수는 어떤 의미인가요?


박: 난 장애인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었어. 그랬던 내가 그 밑바닥에 떨어져서 그들과 같은 불쌍한 인간이 되어버렸으니 속상해 죽겠지. 나는 마도로스가 되거나 그렇게 넓은 세상 돌아다니면서 살아야 되는데, 이런 뇌병변장애인들을 만나니까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겠어. 해병대 특수수색대 출신인 내가… 그런데 그 장애인이 운동이라는 걸 한다네, 그것도 굉장히 진지하게. 거기다 마르크스까지 끌고 와서 나한테 이야길 해대니.


홍: 같잖았어요?


박: 같잖았지.


홍: 그런데 물드셨네요.


박: 그러게 말이야. 내가 노들야학으로 연결됐던 가장 큰 고리였지, 태수가. 집이 가까워서 복지관 수료한 뒤엔 1년 동안 계속 붙어 지냈어. 맨날 전화해서 뭐 하냐, 나와라, 만나서 과자 사 먹고. 운 좋으면 사람들 몇 명 모여서 길동에서 감자탕 먹고. 그땐 감자탕이 최고였어. 그러다가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생각해 봐. 89년에 직업훈련학교 졸업하고 동문회를 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할 게 뭐가 있었겠어? 없잖아! 졸업도 했겠다, 데모라는 게 항상 있는 것도 아니잖아. 하루 종일 고덕동을 벗어날 일이 없었어. 지겹도록 만났지.


홍: 둘은 동지라기보다 친구네요.


박: 나는 말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태수가 나랑 가장 가깝게 놀아줬던 사람이지. 나는 그때 얘기할 사람이 우리 어머님밖에 없었거든. 태수가 내가 처음 만난 장애인인데 그 장애인이 사람으로 보였던 거지, 불쌍한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 사고로 다친 후에 장애를 못 받아들이면서 5년을 살다가,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휠체어 밀고 겨우 집 밖으로 나왔던 그 시기에 목발 짚은 태수가 왔지. 아이고, 이것도 삶이구나, 이렇게 사는 것도 삶이구나, 사람이구나, 사람의 감정을 갖고 있구나, 이런 느낌을 처음 받은 거지. 그런데 거기다가 데모까지 하는 사람이었던 거지. 충격이었지. 태수가 나한테 어떤 의미냐… 장애인운동이라는 걸,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걸 충격적으로 알게 해준 사람.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방식의 장애인이 아니라, 또 다른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지. 얕은 지식으로 티격태격 사상 논쟁을 해 가면서.


홍: 정태수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어요?


박: 그럼. 태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고 끊임없이 이야기했어. 태수는 사회적, 제도적 모순에 의해 희생된 게 아니라 그냥 장애인운동 조직활동가잖아. 최옥란처럼 가난했던 것도 아니고 리프트 타다가 떨어져 죽은 것도 아니야. 그런데도 태수를 찾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 인간관계가 여전히 살아남아 있지. 그 정도로 폭넓은 관계를 가진 건 태수가 최고일 것 같아. 가장 신뢰를 많이 받았던 친구야. 그가 활동하는 모습이 그랬어. 최대한 들어주고. 태수가 문제해결의 중심에 섰던 때가 많아. 조직하는 걸 재밌어하던 애야. 뛰어난 조직 활동가지. 폭넓게 다가가고 그다음에 뿌리 뽑힐 때까지 조직하는 거야.

 

▷ 다음 편 :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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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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