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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수 ⑤] 골리앗의 패배, 인천 아암도 전사들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박흥수의 삶과 죽음 ⑤
등록일 [ 2019년12월24일 11시46분 ]

▷ ④부 죽음의 행렬,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복수

 

1995년 10월경, 인천 아암도에는 망루가 세워졌다. 11월 24일, 노점상들은 망루에 오른다. 망루는 30명이 족히 머물 만큼 컸지만, 어째 초라한 느낌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허름함 곁으로는 결의가 그득했다. 그러나 결의란 대개 두려움을 동반하는 법이다. 망루는 노동자들이 결사 투쟁 때 오르던 대형 크레인에서 이름을 따와 ‘골리앗’이라 불리곤 했지만, 그 웅장한 호명이 무색할 정도로 그저 위태로워만 보이기도 했다. 온통 적들로 둘러싸인 이 구조물은 바깥세상에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유난히 차가웠던 바닷바람만이 골리앗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그 위에 자리한 이들의 살갗을 꾸준히 에고 있었다.

 

당시 인천 아암도 망루. 사진 최인기

 

골리앗 위에 선 노점상들 중에는 붉은 추리닝으로 몸을 감싼 소아마비 장애인이 한 명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덕인, 장자추 아암도지부 총무였다.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서, 그는 동료들을 격려하며 ‘늙은 노점상의 노래’를 큰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무엇이 됐냐. 처자식 먹여 살리려 노점상이 되었단다.”

 

날씨 탓이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없이 펼쳐진 칙칙한 개펄 탓이었을까. 유난히 힘이 실린 그의 목소리에는 어째 구슬픈 맛이 묻어났다. 어쩌면 이미 엄청난 전투를 치른 후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노점상들이 망루에 오르자마자 소방차의 물대포 세례가 쏟아졌으나, 노점상들에게는 찬물로 젖은 몸을 녹일 수단도, 먹을 것도 얼마 없었다. 망루 밑에서는 강철로 만들어진 포클레인이 꾸준히 공격을 가해 오는데, 골리앗이 가진 무기라고는 고작 화염병 몇 개와 인분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마저도 다 소진되었다.

 

이덕인의 외모는 유난히 존재감이 컸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그때 입은 붉은 추리닝은 경찰들과 깡패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그가 망루 밑 시야에 나타날 때마다 곳곳에서 쌍욕 섞인 고함이 들려왔다.

 

“빨간 추리닝! 내려와! 너 죽여 버린다!”

 

이들이 골리앗에 오른 이유는 여느 곳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먹고 살아보겠다는 거였다. “아암도 바로 앞 갯벌까지 송도 3지구 매립공사가 완료되면서 해안선 백사장에서 돌출한 형태의 작은 언덕이 되었다. 그리고 1994년 7월 개통된 폭 40m의 해안도로가 뚫리면서 아암도 근처에 노점상이 하나둘씩 들어서게 된다.”(최인기,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야기, 민플러스, 2019.05.15.) 좋은 풍광을 가진 이 새로 만들어진 땅은 가난한 자들에게 작은 기회처럼 여겨졌다. 언제나 그랬듯 가난한 자들은 한 번 제대로 먹고살아 보겠다고 “사람들이 오가고 머무는 곳, 변화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도시의 틈바구니를 비집고”(최예륜, 그날의 아암도, 비마이너, 2019.10.22.) 들어갔다. 이덕인의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국가는 그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발버둥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박흥수는 장자추 인천 아암도지부가 발족하고 나서부터 청계천 노점 동지들과 함께 자동차로, 자신의 삼륜 오토바이로 자주 아암도를 방문했다. 그리고 아암도 노점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곳곳에서 싸움판을 벌였다.

 

“연수구청이었나, 경찰서였나 우리 단위가 항의 방문을 하러 갔었어. 그런데 경찰 쪽에서 어떤 자식이 앞으로 쭉 나오더라고. 처음엔 뭐 협상하러 나오나 싶었지? 그런데 흥수형한테 다가가더니 흥수형을 급작스레 팍 하고 밀어 버리는 거야. 흥수형이 완전 뒤로 나자빠졌어.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쿵 하고 부딪쳤네? 우리 쪽서 그 후론 뭐 장난 아니었지. 경찰들한테 목발 막 휘두르고. 열 받잖아. 이 자식들이 흥수형을. 난 정말 큰 일 난 줄 알고 흥수형을 바로 차에다 옮겼거든? 그런데 보니까 멀쩡해. 뒤통수 쪽에 뭐 작은 상처 하나도 안 보이는 거야. 다행이다 싶었는데, 경찰들한테 생색내려면 뒤통수에 상처라도 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또 얼마 후엔 같이 웃었지.” (김종환)

 

11월 24일 오전 7시, 아암도 노점상들에 대한 철거가 기습적으로 시작되고 이에 인천 동지들이 망루에 오르자, 박흥수와 서울 동지들은 또다시 곧장 아암도로 향했다.

 

“차 두 대에 장자추 회원들을 빼곡히 싣고서 아암도에 갔었는데, 그중 한 대는 그래도 근처까지 가긴 갔었고, 다른 한 대는 가다가 경찰 벽에 완전히 가로막혀 버렸어요. 제가 가로막힌 차에 타고 있었는데, 내려서 우리 차를 막은 전경차를 다 박살 내고 저희도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려 했던 기억이 있어요.” (조성남)

 

그렇게 겨우 망루 근처까지 다가간다고 해서 보급품을 곧장 망루로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골리앗은 경찰, 군인, 용역깡패 등으로 완전 봉쇄되어 있었던 탓이다. 오히려 망루 바깥 곳곳에서 장자추 회원들은 마구 구타를 당했다. 생필품, 의약품만이라도 좀 전달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던 이들은 대거 연행되어 버리기도 한다. 물론 연행된 이들 역시 어김없이 경찰서 안에서 흠씬 두들겨 맞았다.

 

망루 안팎 곳곳에서 사투가 이어지던 11월 25일 오후 1시경, 박흥수는 경찰들과의 협의 끝에 겨우 망루 근처로 들어갈 기회를 얻는다. 망루 밑에 도달한 박흥수는 이덕인의 붉은 추리닝이 너무 눈에 띈다며, 자신의 옷과 바꿔 입을 것을 제안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흑갈색 골덴 바지를 이덕인의 추리닝과 바꿔 입었다고 전해진다.(최인기, 핏빛 노을 가득한 아암도, 누리하제, 노나메기, 2014)*) 기회를 봐서 꼭 보급품을 전달하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도 건넸다.

 

그날 저녁 11명이 망루 밑으로 내려가 곧장 연행되었다. 얼마 후 저녁 8시경에는 이덕인이 탈출을 위해 동료 한 명과 함께 적들 몰래 망루 밑으로 내려온다. 바닷물은 어느덧 그의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그와 함께 망루 밑을 내려간 동료는 전경에게 발각된 것 같다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망루로 올랐으나, 이덕인은 먼저 가겠다고 손짓을 하고선 계속 앞서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숨이 붙어있는 이덕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사흘 뒤 동료에 의해 그의 주검이 발견되었을 때, 그의 몸 곳곳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피멍이 든 곳도 많았다. 손목을 비롯한 그의 몸 전체가 죄수를 묶듯 밧줄로 칭칭 감겨 있었고, 상의와 신발은 벗겨진 채 오직 흑갈색 골덴 바지만 입혀져 있었다.

 

실종 사흘 후, 온몸에 밧줄이 묶이고 피멍이 든 채 인천 아암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이덕인 열사의 모습. 당시 이덕인 열사가 입고 있던 흑갈색 골덴 바지는 박흥수 열사의 바지라는 설도 있다. 사진 최인기

 

이덕인의 시신은 발견 뒤 얼마 후 세광병원에서 길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경찰은 그 과정에서 그의 시신을 탈취하려 시도한다. 장자추 회원들은 물론이고, 다른 행사 덕에 대부분 서울에 있어 잠시 아암도를 떠나 있던 전노련 회원들까지 달려와 시신 탈취를 막아섰다. 인하대 학생 80여 명도 찾아와 장애인, 노점상들과 함께 대오를 이뤘다. 사투 끝에 영안실로 이덕인의 시신을 겨우 들여보내는 데 성공했지만, 경찰은 포기하지 않았다. 경찰은 병원 유리창을 깨고 콘크리트 벽을 부수면서 영안실로 돌진해 들어왔다. 지키려는 자들과 빼앗으려 하는 자들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고, 이 과정에서 실명을 한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결국 경찰은 이덕인의 시신을 빼앗아 가는 데 성공한다.

 

그들은 저들 맘대로 부검을 하고는 이덕인의 사인을 ‘익사’로 발표한다. 장애인, 노점상들, 그리고 이덕인의 부모는 이제 또다시 긴 투쟁을 시작해야만 했다. 동지들은 의문으로 가득 차 버린 이덕인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의 명예를 회복해 내야만 했다. 아울러 이 싸움과 함께 장애인, 노점상들의 처참한 죽음들을 세상에 알리고, 자신들이 왜 노점상을 통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해 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기나긴 영안실 투쟁이 시작된다.

 

“흥수형이 그때 영안실에 5개월 넘게 상주하고 이랬었거든. 거기서 자주 막 술을 드셨지….” (김종환)

 

그러나 술을 먹고 있는 모습 외에 당시 박흥수의 태도나 구체적 입장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다만 많은 연대 단위들이 이덕인 사태의 대책위로 나섰는데, 최정환 대책위나 빈민장례위에서 그러했듯, 그곳에서도 박흥수는 타협을 기어코 반대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진다. “세 달 넘게 이어진 영안실 투쟁에서 정권에 타협하려는 자들을 꾸짖는 당신의 호통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박흥수 추모시, 장애해방열사 단 홈페이지) 그의 고집 덕에 영안실에서는 종종 갈등이 번졌고, 그 갈등들을 겪을 때마다 박흥수는 점점 더 분노에 차오른 모습을 보였다는 것까지. 이덕인 영안실 투쟁 때 박흥수와 많은 시간을 보낸 한 동지는 당시의 무력감을 이렇게 토로했다.

 

“열심히 참여하긴 했지만 사실 당시 장애인운동 단위가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았어요. 장애인 단위로서는 여러모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상호)

 

박흥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박흥수는 생애 처음 마주하는 거대한 패배감에 허우적거렸다. 이전의 실패들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전에 겪은 좌절들이 영안실 투쟁을 계기로 어깨를 한꺼번에 짓눌러 오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을 막아 보겠다고 장자추를 시작했건만 죽음의 행렬은 더 길어져 버렸으니, 온 책임을 저 혼자 떠맡길 좋아했던 박흥수 성격에 견디기 힘들었을런지도…….

 

결국 이덕인의 장례는 그 의문스런 죽음의 진상을 기어코 밝혀내지 못한 채 1996년 4월 24일에 치러졌다. 어느덧 투사가 되어버린 이덕인의 부모 김정자, 이기주 씨의 여태껏 풀리지 않은 한을 짙게 남긴 채.

 

아암도 골리앗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조용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         *          *

 

*)  진상조사위 과정에서 당시 아암도 투쟁에 참여했던 이가 내놓은 발언으로 추정된다.

 

▷ ⑥부에서 계속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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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msophist1@gmail.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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