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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수 ⑥] 장애인운동의 카나리아와 광부들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박흥수의 삶과 죽음 ⑥
등록일 [ 2019년12월26일 11시27분 ]

▷ ⑤부 골리앗의 패배, 인천 아암도 전사들

 

카나리아의 몰락

 

이덕인 투쟁이 끝나고 얼마 뒤, 박흥수는 신내동에 방 두 칸짜리 영세민 아파트(임대아파트)를 얻어 살았다. 그리고 마침 주머니 사정이 힘들어져 거주할 곳을 잃은 이상호에게 함께 살 것을 제안한다.

 

“제가 추진하던 투쟁 예술 사업들이 다 잘 안 되었어요. 완전 말아먹었죠. 제 보증금까지 빼서 갚아야 할 지경이었으니, 하하. 반년 동안 잘 데가 없고 그랬어요. 어느 날은 제가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 짠했나 봐요. 흥수형이 갑자기 절 불러다가 차를 끌고선 어디를 좀 가자고 하더라고요. ‘어디요?’ 했더니 교외에 닭도리탕이나 먹으러 가자고. 후배들 힘들 때면 종종 닭도리탕을 먹으러 데려가곤 했었거든요. 그래서 거기 가서 닭도리탕을 먹는데 갑자기 그랬어요. ‘그러지 말고 들어와 살아, 이 새꺄.’ ‘네? 정말 그래도 돼요?’ ‘시끄럽고 밖에서 그만 힘들어하고 들어와 임마.’ 그래서 뭐 들어가서 함께 살기 시작했죠. 너무 고마웠어요.” (이상호)

 

이미 술에 쩔대로 쩔어 있었지만, 어쩌면 이때까지도 박흥수는 예전의 따스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나비 같던 그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론 박흥수는 아암도 투쟁 말미 정태수 열사가 주도한 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 등에 제 삼륜 오토바이를 끌고선 전국 각지에 나타나기도 했고, 아암도 투쟁이 끝난 후에도 청계천 노점 확보 투쟁에 종종 모습을 드러냈지만, 더는 선봉에 서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를 리더로 생각했던 후배들이 몇 번이고 어느어느 조직의 대표, 어느어느 단체의 회장으로 그를 추대하려 시도했으나, “나는 야전 스타일이야! 대표 되면 현장에 못 있잖아!”라고 고사하며 곧장 최전선으로 달려가던 그의 모습은 이제 없었다.

 

“투쟁 때는 주로 뒤에서 지켜보시는 분이었죠. 저는 큰 싸움들이 다 끝나고, 그러니까 아암도 투쟁도 다 끝나고 만난 거라. 그 이전엔 달랐을지도 모르죠.” (고명선)

 

1996년 ‘제1회 장애인고용촉진 걷기대회’에 참석한 박흥수 열사. 앞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 빵모자를 쓰고 목발 짚은 사람이 박흥수 열사. 사진 장애해방열사 단

 

맞다. 이전의 그는 달랐던 것 같다. 95년 그를 만난 동지가 그를 이렇게 묘사했을 정도니 말이다.

 

“탄광의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가기 전에 새를 먼저 들여보낸다고 해요. 카나리아라는 새인데. 카나리아가 동굴 밖으로 돌아오면 탄광 안에 가스가 없구나 하고 안심하고 들어가죠. 안 돌아오면 사람도 그 동굴에 안 들어가고. 박흥수 선배는 뭔가 카나리아 같았어요. 위험한 데면 돌연 나타나서는 먼저 불 속으로 뛰어들고, 그렇게 동지들에게 힘을 실어주죠.” (익명 요청)

 

그러나 96년 상황에서 카나리아의 의지는 이미 꺾일 대로 꺾였다. 웬만한 계기가 아니고서야 도무지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IMF 이후 시기라 실업자 운동이 주목받을 때였어. 그때 99년에 장애인실업자연대를 만들고 박흥수 형을 초대 위원장에 앉히려 했지. 그런데 정말로 삼고초려였어. 일곱 여덟 번 찾아갔나? 몸이 안 좋아서 안 하신다고 계속 그래서 계속 찾아가서 부탁하고, 부탁하고. 그래서 겨우 맡으셨는데, 사실상 거의 활동을 못 하셨지. 물론 흥수형이 위원장 맡고선 잠깐은 술을 줄였었어. 의지가 있으셨던 거지. 그런데 결국 조직이 잘 안 되었어. 흥수형 말처럼 대중적 기반이 탄탄해야 하는데, 실업자들은 취업하면 떠나고 그러니 사실 이 단체를 조직화하기가 쉽지 않았지. 예산 지원받아서 행사 하나 하고 끝내고 또 행사 하나 끝내고 그런 걸 벗어나질 못했으니까. 그렇게 대중 조직이 또 잘되지 않으니 흥수형은 다시 원래대로 알콜릭 상태로 계속 지내고…” (문상민)

 

박흥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가 제 존재 전체를 걸고 싸워왔던 모든 것들이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다. ‘혁명의 물리적 근거지’도 오래가지 못했고, 최정환 투쟁도, 이덕인 투쟁도 처참하게 박살 났다. 못 배운 이들과 함께 혁명의 최전선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장자추 활동을 그만두는 이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일상의 전쟁을 견디다 못해서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장애 특성상 꾸준히 노점 운영을 하기 힘들어 장사를 접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에야 전노련 소속 비장애인 노점상들이 자리가 안정될 때까지 장사를 도와주곤 했지만, 결국 그들도 따로 자기 장사를 해야 하니 언제고 그러한 도움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청계천 쪽이야 조금 안정이 되었었죠. 하지만 종로나 다른 데는 흥수형이 참 노력을 많이 했지만 다 잘 안 되었어요.” (조성남)

 

박흥수의 몸도 이제는 한계를 넘은 듯 보였다. 그간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였을까? 하긴 언제부턴가 그가 취하지 않은 모습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암도 투쟁이 끝난 뒤 당뇨가 심해진 그는 약의 양을 점점 늘려가야만 했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세 번이나 장기 입원을 했는데, 그 덕에 정태수를 비롯한 몇 명의 후배들은 그가 입원할 병원을 백방 알아보러 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계속 술을 마셨다. 정태수, 이상호, 조성남, 김종환, 박경석, 문상민 등 후배들까지 형 이제 몸도 안 좋으니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를 건네는 경우도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후배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긴 어쩌면 더 이상 술 없이는 삶을 견뎌가기 힘든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본인이라고 다시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는 싸움의 최전선에 나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놓기도 했다. “낮과 밤이 다르다. 이겨내야 되는데 자꾸 졸립다. 청계천에 나가야 되는데…… 약의 양이 늘어 가는 데 효과가 없다. 이겨내야 하는데……” (박흥수 일기장, 고 박흥수 동지를 떠나보내며, 정태수추모사업회 홈페이지, 재인용)

 

“같이 살던 집 근처에 단골 해장국집이 있었어요. 형 늦잠 주무시고 11시쯤 일어나면 제가 아점(아침·점심) 겸 해서 해장국 두 그릇, 소주 두 병을 항상 집으로 사가지고 와야 했어요. 이때부턴 이제 사회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죠. 사람이 완전 피폐해졌어요. 그런데 혼자 술을 먹는 것보단 같이 먹는 게 그래도 낫잖아요? 그러니 저도 결국 함께 술을 먹고. 제가 일 나갈 땐 퇴근하고 와서 또 같이 술을 먹고.” (이상호)

 

좀 더 시간이 흐르자, 그는 후배들을 격려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렸다. 과거엔 단 한 번도 제 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고독을 동지들 앞에 드러내려 하지 않은 그였지만, 이제는 술자리가 그의 고독과 신세 한탄으로 채워졌다. 과거 박흥수를 만나 신세 한탄을 하던 후배들은 이제 도리어 그의 신세 한탄을 들어줘야만 했다. “나는 실패했어.” “이대로 가다간 장애인운동도 안 될 거야.” 그래도 거기까지면 나았을 게다. 신세한탄은 곧 분노로 변했다. 그는 술을 먹다 후배들에게 “운동 그딴 식으로 하지 마!”라며 쌍욕을 섞어 힐난하기도 했고, 때로는 분을 참지 못해 소주병을 벽에다 마구 던져 대기도 했다. 처음엔 자택으로 많은 후배들이 찾아왔으나, 그 광경에 그 수는 점점 줄어만 갔다. 그리고 찾아오는 이들의 수가 줄어드는 만큼, 그가 살던 아파트 두 칸 방 곳곳엔 상처가 늘어갔다.

 

“흥수형 살던 아파트가 당시에 특수공법을 써서 짓는다고 이래가지고 진짜 해머로 깨도 안 깨지는 콘크리트로 지었던 거야. 근데 사망하기 한 일 년 전쯤 됐었나. 술 한잔하고 그 집에서 자려고 찾아갔지. 술 먹는데, 눈에서 살기가 느껴지는 거야. 베란다로 나가봤더니 집이 또 이만큼이 깨져 있어. 특수공법으로 지어가지고 안 깨져야 되는데. 그걸 또 술 먹고 부순 거지. ” (김종환)

 

19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에서 정태수 열사(왼쪽)와 박흥수 열사(오른쪽). 박흥수 열사가 자신의 삼륜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다.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어쩌면 당시 그의 분노는 90년대 후반 장애인운동 진영의 탈대중화 및 침체와 맞물려 더 심해졌는지도 모른다.

 

“DPI(한국장애인연맹)랑 전장협 통합논의 오갈 때 흥수형 입장은 DPI랑 결이 좀 많이 달랐지. DPI가 당사자주의를 표방했지만 사실상 대중이 없는 머리 조직이었고 이 조직을 통해 제도 정치권에 발 들이려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흥수형은 그런 걸 참 많이 경계했었지.” (문상민)

 

“DPI와 전장협이 통합될 때 거기 있던 유명한 운동권 출신 OO이 전장협 노점분과 회원들을 다 자르겠다는 거야. 노점상은 생산수단을 가진 쁘띠부르주아라 혁명의 결정적인 시기가 되면 끝까지 반항할 거라고. 나는 그게 말이 되냐고 싸웠었지. 상황이 이러니 흥수형도 DPI 통합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터지고 하는 걸 보면서 운동이 어떻게 이 모양 이 꼴이 돼가고 있나,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겠지. 그런데 이미 알콜릭이 됐을 때라 대화를 섞기가 참 힘들었어. 그래서 당시 운동적 고민들을 잘 알 수는 없지만, 분노가 엄청 쌓여 있긴 했지.” (김종환)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전장협 부설기관이었던 노들장애인야학이 DPI와 전장협 간의 통합에 반대하고 뛰쳐나와 장애인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독립적으로 조금씩이나마 다져가고 있었다는 점일 게다.

 

“이전에는 상근자들이나 소수 활동가들 중심으로만 싸움이 일어났지. 제도 이야기를 많이 하고 대중들이 삶에서 당장 맞부딪히는 그런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워서 싸우질 못한 거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 최초로 장애인운동에서 그런 걸 시도한 게 바로 당시 거의 유일한 장애인 운동대중조직이었던 노들야학이 주도한 이동권 투쟁이야. 그랬기 때문에 흥수형이 대표로 있었던 장애인실업자연대(아래 장실련)도 거기에 함께 하게 된 거지. 흥수형이나 장실련이 그때도 노들야학을 계속 만나고, 경석이형을 만나고 했던 것도 그래서였던 거겠지.” (문상민)

 

그러나 박흥수에게는 더 이상 침체기에 들어선 장애인운동을 되살릴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동권 투쟁 때도 가끔 나오긴 했지. 그런데 뭐 엄청 열심히 참여한 건 아니었고… 와서 뒤에 있다가 금방 가곤 했어.” (박경석)

 

몇 년 후, 함께 동거하던 이상호는 개인 사정으로 박흥수의 집에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제 박흥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독 속에서 홀로 몸부림쳐 갔다. 물론 정태수, 이상호를 비롯한 후배들이 가끔 찾아와 그를 돌보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갔다.

 

홀로 생활을 영위한 지 몇 달 쯤 지났을까. 그래도 가끔씩은 외출하던 그의 모습조차 언제부터인가 더는 보이질 않았다. 결국 그의 이웃이었던 성장협 동료가 불안한 마음에 집 대문을 두들겨 보았다. 아무리 두들기고 불러 봐도 집 안에서는 전혀 기척이 없었다. 걱정이 된 동료는 곧바로 신고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집 대문이 열렸을 때, 박흥수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2001년 7월 23일, 당시 그의 나이 42세였다. 죽고서 얼마 후에야 발견됐으니, 그가 어느 날 어떻게 사망했는지조차 산 자들에게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고독 속에서 한 평생을 허덕였던 걸 생각해 본다면, 삶 내내 변방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걸 생각해 본다면 참 그다운, 그러나 장애인운동판의 카나리아로, ‘큰형’으로 살아온 그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또 참 그답지 않은 최후였다.

 

박흥수 열사 장례식 때의 모습. 현수막에는 “근조. 장애인운동가 고 박흥수 동지 장례식”이라고 써있다. 사진 장애해방열사 단

 

열사의 꿈

 

“흥수형한테 도대체 형 꿈이 뭐냐 물어본 적이 있었지. 워낙에 열심히 싸우니까 정말로 뭘 위해 그러는지 궁금했거든. 그랬더니 의외의 답변을 하는 거야. 뭐 엄청 대단한 걸 이야기할 줄 알았더니만, 뭐 그런 거 있잖아 권력을 잡아가지고 세상을 변혁하겠다거나 그런 거. 그런데 정작 자기 꿈은 ‘한강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낚시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래. 정말 의외였지.” (박경석)

 

그러나 박흥수는 잠시만 시간을 낸다면 당장 이룰 수 있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할 생각이 그다지 없어 보였다. 어쩌면 장애인들과 못 배운 자들, 가난한 자들이 모두 자신이 누리고 싶은 풍경에서 노닐 수 있을 때야 자신도 비로소 제 꿈을 이룰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흥수형이 자기 생활이 없이 생활하던 것에 대해서 참 화가 많이 났어요. 형 개인 생활 좀 돌보라 해도 조직과 대의만 쫓았던 그런 사람이었어요. 흥수형 떠올려보면 ‘박흥수 개인의 삶이 없었다’는 사실, 그걸 좀 많이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고요.” (조성남)

 

이런 식으로 살다 떠나서였을까? 당시 그와 활동했던 많은 이들은 박흥수의 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전 박흥수 선배를 정말 존경하고 선배가 이 시대에 재조명되는 게 당연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지금까지도 박흥수 선배에게 죄송하고, 당신처럼 못 살아서 너무 미안하고… 다만 전 솔직히 후배 활동가들이 박흥수 선배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건강해야죠. 건강해야 싸움도 오래 지속할 수 있지요. 전 지금 세대들이 박흥수란 사람을 기억하면서 꼭 자기 건강을 다시 한번 더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익명 요청)

 

박흥수는 정말로 장애인운동사에서 ‘탄광 속 카나리아’로 기록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후 한국 장애인운동가들이 어떤 길로 들어서야 하는지, 어떤 길로 들어서면 안 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2001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동문회 ‘싹틈’ 동문들과 그 가족들이 박흥수 열사 묘소에 다녀오는 길에 식사 후 찍은 단체 사진. 사진 날짜 설정이 잘못되어 92년이라고 되어 있다.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이들은 카나리아의 메시지를 받은 후에야 제 갈 길을 정하는 광부들처럼, 박흥수의 메시지 위에서 저들이 마주친 시대와 각자의 방식으로 싸워가고 있다. 심지어 박흥수가 금방 운동 세계를 떠날 거라 예견했던 박경석은 그의 메시지를 따르는 가장 성실한 광부 중 하나가 되었다. 박흥수가 죽은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야학의 ‘못 배운 자’들과 함께, 전국 각지의 장애인 빈민 대중들과 함께 도로를 점거하고 관공서를 점거해 가며 세상과 맞서 가고 있는 것이다.

 

“흥수형한테 내가 배운 건 그거야. 언제나 투쟁에선 대중을 조직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 아니면 투쟁할 때 도로 한 차선이라도 더 점거하는 그런 정신? 흐흐흐.”(박경석)

 

어디 박경석뿐이겠는가? 장판의 가장 성실한 광부 중 한 명이었던 정태수는 금방 박흥수를 뒤따라 세상을 떠났지만, 박흥수의 투쟁은 여전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여러 광부들을 통해 다른 듯 비슷하게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박흥수는 저세상에서도 여전히 제 꿈을 유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스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참 답답할 정도로 고집스러운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니 이 세상 가장 낮은 자들에 의해 정말로 세상이 뒤집히고, 그래서 모두가 원할 때라면 언제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한강에서 낚시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자신이 그러한 것을 즐기는 것은 사치라고 지금도 그는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독한 소주 한 잔만큼은 여전히 제 앞에 가득 따라두고선. 살아생전 그러했듯 “삼발이 오토바이에 목발을 휘두르며 전경들 앞으로”(이상호, “흥수형이 많이 그립습니다.” 장애해방! 인간해방! 정태수열사추모자료집, 2002) 돌진할 준비를 언제든 해두고선.

 

그는 언제쯤 제 꿈을 이룰 수 있을까?

 

○ 참고자료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편, 한국사회 장애민중운동의 역사, 2005.
중증장애인의 삶의 실태와 그 대책안,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1995.
박경석,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책으로 여는 세상, 2013.
최인기, 핏빛 노을 가득한 아암도, 누리하제, 노나메기, 2014.
최인기,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야기. 민플러스, 2019.05.15.
최예륜, 그날의 아암도, 비마이너, 2019.10.22.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차보고서(2000.10~2002.10), 2003.1.
장애자 복지회관 “‘짓는다’‘안된다’: 장애자-주민 대치 6개월”, 중앙일보, 1988. 5. 24.
2012년 1017 빈곤철폐의 날 열사추모제 자료집, 빈곤철폐의 날 조직위원회,
박흥수 추모시, 장애해방열사_단 홈페이지.
고 박흥수 동지를 떠나 보내며,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홈페이지.

 

○ 도움주신 분들

김종환(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집행국장, 장애인노조 사무국장)
송효정(서울 피플퍼스트 사무국장, 인터뷰 작업 참여)
이상호(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정책위원장)
조성남(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박경석(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 노들장애인야학 고장)
최인기(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문상민(민들레장애인야학 사무국장)
익명 요청(전 장자추 활동가)
고명선(전 전장협 활동가)
유희(십시일반 밥묵차)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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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msophist1@gmail.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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