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06월04일thu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펼침
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우동민 ①] 집에서 24년, 시설에서 10년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우동민의 삶과 죽음 ①
등록일 [ 2019년12월27일 11시34분 ]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① 김순석(1952~1984.9.19) 장애인 이동권 등에 항의하며 유서 남기고 자결 _ 정창조
② 최정환(1958~1995.3.21)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 _ 강혜민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④ 박흥수(1958~2001.7.2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정창조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1] 진보적 장애인운동 조직 활동가 정태수 열사 약전(略傳)
[2] 정태수의 동지이자 배우자 김영희 인터뷰
[3] 정태수의 친구이자 동지 박경석 인터뷰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우동민은 종로구 숭인동에서 태어났다. 발붙이고 살 땅 한 평 없는 피난민과 이주민들이 낙산 꼭대기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달동네였다. 동민의 부모는 혼인 후 마을 초입에서 작은 점방을 하는 형님네와 함께 살았다. 아랫동네에서 소주나 빵을 10원에 사 와 12원에 파는 식의 조그마한 가게였고 안쪽 모서리 방에 부부가 살았다. 날림으로 지은 집에는 수도가 없어 공동수도에서 한 통에 2원을 주고 물을 길어다 생활했다. 동민 아버지는 당시 일을 찾지 못해 형님을 돕고 있었는데 형님네도 형편이 어려워 부부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동민을 임신한 엄마는 시래기를 주워다 삶아 먹었다. 이마저도 없어 굶는 날이 많았다.

 

명휘원 시절 우동민 열사(가운데). 사진제공 권순자(우동민 열사 어머니)

 

바닥에서 흐른 시간

 

1968년 10월 24일 앙상하게 마른 엄마는 작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동민은 젖을 잘 빨지 못해 또래보다 한참 작았다. 돌이 지나도 목을 이기지 못해 휘청였고 옹알이는 말이 되지 못했다. 어렵게 찾아간 한의원에서 의사는 엄마가 굶어서 아이가 뱃속에서 병을 얻었다고 했다. 엄마는 스스로를 탓했다. 동민에 이어 여자아이 둘과 남자아이 한 명이 더 태어났다. 연이은 출산에 제대로 먹지 못한 엄마는 폐결핵에 걸리고 만다. 밤에 기침이 나오면 엄마는 주인집 눈치가 보여 입을 틀어막고 집을 나와 골목 구석에서 마른기침과 피를 토했다.


동민 아버지는 가구점에서 장롱 배달하는 일을 했다. 혼자 벌어 여섯 식구를 먹여야 했으니 살림은 쉬 펴지지 않았다. 그 시절 동민의 가족은 나들이를 가거나 외식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 아버지 월급날에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은 게 특식이라면 특식인데 그마저도 동민이가 여남은 살이 넘어서 해본 일이었다. 식구들이 함께 외출해야 할 때가 드물게 있었는데 엄마는 어린 동생들이 아니라 걷지 못하는 동민을 업어야 했다. 부모는 작은 아이에게 장애가 있었더라면 큰아이가 도왔을 텐데 하필 맏이가 이렇다고 작게 한탄했다. 동민의 외출은 막내가 태어나자 거의 사라졌다.


동민의 가족은 동대문에서 면목동으로, 또 신길동에서 구로로 열댓 번이 넘게 집을 옮겨야 했다. 아이가 넷이면 세를 잘 주지 않아 둘이라고 속여 들어갔다 쫓겨난 적도 있었다. 단칸방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 가족은 좁은 방이 불편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부모는 네 아이가 굶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동민과 동생들은 작은 방에 옹기종기 엉켜서 놀았다. 별다른 장난감이 없어 바닥을 기며 서로가 장난감이 되어주곤 했는데 동민은 항상 동생들의 장난을 몸으로 받아주었다. 동생들에게는 어떤 잘못도 받아주는 너그러운 형이고 오빠였다. 한 덩어리가 되어 놀던 동생들은 여덟 살이 되자 하나둘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부모는 집 밖의 동민을 상상해보지 못했다. 동민의 장애는 부모 탓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동민의 삶은 자신들의 책임이었다. 재우고 입히고 굶기지 않는 것이 부모에게는 최선이었다. 동민은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


동생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동민이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동민은 아침밥을 먹고 방에 들어가 라디오를 들었고, 점심을 먹고 라디오를 틀고, 저녁을 먹고 다시 라디오를 찾았다. 동민의 하루는 라디오 프로그램과 함께 흘렀고 세상은 소리로 전달되었다. 스무 살 무렵부터는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를 들었다. 남동생에게 형은 옆으로 누워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를 듣고 있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동민은 동생들이 보던 한글공부 책을 장난감 삼아 뒤적였다. 온종일 혼자 ‘가’를 그리다가 좀 익숙해지면 ‘나’를 그렸고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우’ ‘동’ ‘민’ 세 글자를 쓰게 되었다. 한글은 그리는 수준으로밖에 익히지 못했다. 아버지는 동민의 무료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싶어 쉬는 날이면 장기를 가르쳤다. 동민의 장기 실력은 나날이 늘었고 남동생은 형을 장기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

 

우동민 열사 아버지. 사진제공 권순자(우동민 열사 어머니)

 

안에서 바라본 바깥

 

동민이 열아홉이 되었을 때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를 갔다. 새로 지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동민과 남동생이 같이 쓰는 방 한쪽에는 개킨 이부자리와 라디오가, 남동생 책상 옆으로는 작은 창이 하나 있었다. 동생이 등교하면 동민은 팔로 의자를 딛고 올라가 책상 위에 앉았다. 창 너머가 보이는 높이였다. 동민은 책상에 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자동차를 구경했다.


동민은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어 집 안에서는 팔 힘을 이용해 기어 다녔다. 다리가 바닥에 쓸려 무릎에 염증을 달고 살았는데 주먹만 한 혹이 나기도 했다. 동민이 문밖을 나갈 일은 거의 없었다. 동민은 방 안에 있다가 기어서 화장실에 가고 방 안에 있다가 기어서 거실에 나갔다. 현관문은 주로 아침과 저녁에, 동생들이 학교에 갈 때, 아버지가 출근할 때, 어머니가 장 보러 갈 때 열렸다. 동민의 시선이 닿는 바깥은 앞 건물에 가려진 좁은 하늘뿐이었다.


동민이 스물한 살이 된 어느 날 엄마가 외출에서 돌아왔는데 방 안에 있어야 할 동민이 없었다. 가족들은 놀라 집 안팎을 찾았고 15층에서 난간을 붙들고 서있던 동민을 발견했다. 동민은 복도 난간을 붙잡고 당시 살던 7층에서 아파트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동민이 언제부터 현관문을 열고 나갔는지 가족들은 알지 못했다. 첫날은 자신이 살던 7층 계단 앞까지 갔을 테고, 어느 날은 계단 난간을 붙들고 한 층 오르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10층, 12층, 하루하루가 쌓여 도착했던 15층에서 동민은 바깥을 오래 바라보았다.


가족에게 외출을 들킨 이후 동민은 현관문을 여는데 더는 눈치를 보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걷는데 보통은 20분 정도가 걸리는데 동민은 목발로 앞을 짚어가며 3시간이 걸려 돌았다. 계속 비틀거렸고 자주 넘어졌지만 걷는 연습을 쉬지 않았다.


동민이 스물세 살이 된 1990년 겨울,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동민을 시설에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장애인들을 모아 공부시키고 기술을 가르쳐주는 곳이라고 안산에 있던 명휘원을 소개했다. 부모는 동민이 기술을 배우면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시설에 가는 것이 동민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동민은 처음으로 서울을 벗어나게 되었다.

 

동민의 낮과 밤

 

명휘원은 원래 장애남성에게는 목공과 전자, 장애여성에게는 양재와 편물 과목을 가르치는 경증장애인 직업학교였다.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직업인 육성’이라는 원대한 비전을 품었으나 현실에서 원생들은 기술을 배워도 직업인이 되기 힘들었다. 명휘원은 1990년 광명시에서 안산 남쪽 끝자락으로 시설을 이전하며 직업학교가 아닌 중증장애인 보호작업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우동민은 시설 안팎이 새로 정비된 다음 해인 1991년 입소했다. 입소 선배였던 이원교는 우동민을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순하고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이원교가 스물여섯, 우동민은 스물넷이었다.


원생들은 명휘원 내 거주시설에 살면서 보호작업장에서 나무젓가락 봉지 끼우기, 장난감 만들기, 물파스 불량 고르기 등과 같은 단순작업을 했다. 시설의 일상은 보호작업장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6시 기상, 7시 아침식사, 9시 작업, 12시 점심식사, 13시 작업, 16시 자유시간, 18시 저녁식사, 20시 점호, 22시 소등. 원생들은 시설 일정에 몸을 맞추며 사감의 지도에 따라 생활했다. 지도에 잘 따르지 않는 원생들은 사감과 가까운 방으로 옮겨졌고 사감의 관리를 받아야 했다. 점호시간에는 사감이 방마다 들어와 정리정돈은 잘 되어 있는지, 쓰레기통은 비웠는지, 신발은 가지런히 놓았는지, 방 걸레는 깨끗하게 빨았는지를 검사했다. 그때가 되면 동민은 몸에 배어있던 맏이의 습관대로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다. 휠체어에서 내려와 바닥을 쓸고 걸레로 닦았다. 동민은 입소 3개월 만에 사감과 가장 먼 방으로 배치되었고 방장이 되었다.


시설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삶은 스트레스가 많았다. 명휘원은 주말 외출이 가능했는데 원생들은 종종 읍내에 있는 호프집에 모여 술을 마셨다. 취해서 들어온다거나 싸움을 하는 등의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이 부모님 말씀에 순응하며 살아온 동민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생들은 보호작업장에서 일하고 한 달에 5만 원을 받았다. 대부분은 그 돈으로 필요한 물건이나 옷을 사거나 주말에 읍내에 있는 호프집에서 술을 한잔했다. 동민은 그 돈을 쓰지 않고 모았다. 하루는 김기정이 물었다. 동민이 느리게 했던 말을 기정은 아직까지 기억한다.


“동민아, 그 돈 그렇게 모아서 뭐 할 거야?”
“누나, 나는 맏아들이야.”


돈을 처음 벌어본 동민은 전부 모아 엄마에게 주고 싶었다. 동민은 돈 때문에 고생했던 엄마를 기억했고 가족이 기대하지 않았던 맏이와 아들로서의 책임감을 항상 품고 있었다.


우동민이 입소하던 해 명휘원에 발달장애인과 뇌병변장애인이 밀려 들어왔다. 그러면서 전국장애인체육대회를 대비해 뇌병변장애가 있는 원생들에게 보치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원교가 먼저 시작했고 뒤이어 우동민이 합류했다. 보치아는 비교적 넓은 공간이 필요한데 공을 굴리거나 던져서 표적구에 가장 가까이 보낸 선수나 팀이 승리하는 경기다. 동민은 시설에 있는 5년 동안 보치아를 훈련했다. 한여름 무더운 날씨에도 동민은 훈련을 빠진 적이 없다. 그러나 보치아 선수로서 치명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동민은 시력이 아주 좋지 않았다. 그의 눈꺼풀은 강직으로 심하게 떨렸고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았다. 공을 표적구에 가까이 보내는 일이 동민에게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넓은 공간에서 원생들과 어울려 배우는 시간이 즐거웠다. 좁은 방 안에서 혼자 긴 시간을 보내왔던 동민에게 할 일이 생긴 것은 밤과 낮처럼 큰 차이였다.


명휘원에는 여름과 겨울에 방학이 있어서 원생들은 각자 집에서 몇 주 보내고 다시 시설로 돌아와야 했다. 90년대 초,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저상버스나 장애인콜택시는 아예 없었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는커녕 휠체어 리프트조차 설치되지 않은 곳이 더 많던 시절이었다. 동민은 방학 동안 방 안에서만 지내다 시설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즐거워했다. 김기정은 당시를 기억하며 말했다.


“집보다 나았을 거예요. 우선 같이 어울릴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있고, 뭔가 할 수 있는 일도 있고요. 집에서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하고 지낼 바에는 차라리 더 빨리 시설에 들어가서 공부라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어요.”

 

명휘원 시절 우동민 열사. 사진제공 권순자(우동민 열사 어머니)

 

제한된 일상의 작은 즐거움

 

명휘원에는 친구는 물론이고 동민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누나와 형도 있었다. 동민은 작업장에서 친해진 김기정에게 “누나, 커피.”라고 서슴없이 조르곤 했다. 기정이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주면 동민은 조심스레 다리 사이에 종이컵을 고정시키고 수동휠체어를 후문 쪽으로 밀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원교, 김기정, 신인기, 우동민은 점심식사 후 으레 나무 앞에 모였다. 햇볕을 쬐며 커피 마시는 시간이,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동민을 벅차게 했다.


신인기는 명휘원 내 특수학교인 명혜학교에 다니다가 입소한 친구였다. 동민보다 한 살 어렸는데 특유의 친화력으로 형 동생 말고 친구하자며 대뜸 동민의 이름을 불렀다. 신인기는 커피를 좋아하는 동민을 위해 자주 작업장으로 커피를 배달해주었다. 인기는 1층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휠체어와 오른쪽 다리 사이에 종이컵 3잔을 나란히 두고 경사로를 이용해 2층 작업장까지 올라갔다. 이원교, 김기정, 우동민에게 커피가 무사히 배달되면 다들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는데, 무료한 작업 시간을 버티게 했던, 소소하지만 큰 즐거움이었다.


당시 신인기는 곤봉과 포환선수를 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수동휠체어도 스스로 밀고 다녔던 신인기는 라면과 소주 반입 담당이었다. 신인기는 휠체어 뒤에 배낭을 걸고 한 달에 한 번 시설 문을 나섰다. 정문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슈퍼에서 라면 10봉지, 소주 5명을 사 오는 게 신인기의 임무였다. 한 달에 한 번 갖는 비밀회식이었다. 소등하면 하나둘 사감선생님 방과 가장 먼 방으로 모였다. 라면 10개를 부숴서 깨끗이 씻은 양은대야에 한꺼번에 넣고 끓는 물을 부은 다음 익혀 먹었다. 동민이 소주와 회식의 맛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다.


시설에서 휠체어로 10분 정도 나가면 갯벌이었다. 당시는 시화호 방조제가 완공되기 전이라 해안도로에서 밀물과 썰물을 볼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점호까지 1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있었고, 이때 이원교, 김기정, 신인기, 우동민은 수동휠체어를 천천히 밀어 해안도로로 나갔다. 도착하면 노을이 질 무렵이 되는데 바위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어나 처음 접한 바다 냄새, 파도 소리, 너른 갯벌, 노을 빛깔은 동민에게 선명하게 남았다. 무엇보다 이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동민은 오래 기억했다.

 

명휘원 시절 우동민 열사. 사진제공 권순자(우동민 열사 어머니)


명휘원에서 거주할 수 있는 기간은 최대 5년이다. 이원교, 김기정, 신인기는 모두 우동민보다 앞선 95년 퇴소했고 우동민은 함께 어울렸던 무리에서 마지막으로 남았다. 명휘원은 96년에 ‘그룹홈(공동생활가정)’ 운영을 시작했다. 그룹홈은 거주인 4명과 생활교사 1명이 한 집에서 생활하는 소규모 장애인거주시설이었다. 우동민은 그룹홈 1기생이 되어 출퇴근하면서 보호작업장에서의 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룹홈에서의 일상은 시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민은 그곳에서도 방장이었고 3명의 발달장애인과 함께 살았다. 그룹홈의 최대 거주 기간인 5년도 금방 흘렀다.


2001년 동민은 다시 재가장애인이 되었다. 10년이 흐른 후에도 재가장애인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 자원이나 복지서비스가 없던 그 시절, 집은 오히려 시설보다 더 큰 고립과 단절을 안겨줬다. 보치아 경기를 하고 바다를 보러 다녔던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우동민은 서른네 살에 갈 곳과 할 일, 친구를 잃었다. 다행히 시설은 동민에게 하나의 통로를 남겼는데 바로 신인기였다. 1995년 퇴소 후 전국을 떠돌던 신인기가 정착한 곳은 신기하게도 우동민의 집 근처 임대아파트였다. 둘은 2004년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만나게 된다.

 

▷ ②부 세상 속, 우동민의 자리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올려 1 내려 0
홍세미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인권위 벽에 걸린 우동민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목소리
[우동민 ③] 옆도 보고, 뒤도 보면 항상 그가 있었네
[우동민 ②] 세상 속, 우동민의 자리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프린트하기
  •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댓글, 욕설과 혐오를 담은 댓글, 광고 등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삭제될 수 있으니 댓글 작성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동민 ②] 세상 속, 우동민의 자리 (2019-12-29 15:05:00)
[박흥수 ⑥] 장애인운동의 카나리아와 광부들 (2019-12-26 11:27:46)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더보기
기고 칼럼 기자칼럼

기고 작은이미지
비수급 빈곤층 89만 명, 알바생 수진 씨 이야기
누구에게나 가족이 따뜻한 공간은 아닙니다. 빈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이 만...
부모님과는 따로 사는데… 부모님 수입...
[서평] 아픈 사람들의 독서 코뮨주의 - 어...
Beminor SNS 비마이너 페이스북비마이너 트위터비마이너 텔레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