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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민 ②] 세상 속, 우동민의 자리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우동민의 삶과 죽음 ②
등록일 [ 2019년12월29일 15시05분 ]

▷ ①부 집에서 24년, 시설에서 10년

 

우동민이 긴장을 덜고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는 많지 않았다. 함께 활동하는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성북센터) 동료들은 우동민이 그럴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동민이 전한 단어로 문장을 구성해 동민에게 다시 물었다. “동민이 형, 이런 뜻이야?” 동민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젖히거나 저어서 문장을 함께 완성했다. 동료 활동가 외의 사람들에게는 대개 표정이나 고갯짓, 손짓으로 의사 표현을 대신했다. 표정은 대부분 웃음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 표정, 입을 벌리고 침을 튀기며 어금니와 목젖을 환히 내보이는 그 커다란 웃음 말이다.

 

환하게 웃는 우동민 열사. 사진 장애해방열사_단
 

가족은 모르는 표정

 

우동민은 몸을 비틀어서 목구멍까지 소리를 올린 후에 입안에서 한 음절을 만들어냈다. 동민이 힘을 들여 뱉어낸 말은 여러 소리로 갈라져 매끄럽지 못했다. 듣는 사람은 시간과 애정을 들여 소리를 확인해야 했다. 고르고 골라 내어놓은 말은 잘 전해지지 못했다. 동민은 가까운 사람들 외에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부모는 동민의 말 중에 배고프다는 말만 겨우 알아들었다. 동민이 말하는 모습을 보는 데 힘이 들었던 부모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됐다. 그만해라.” 그만 말하게 하는 것이 동민을 덜 힘들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동민과 여섯 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은 어린 시절 동민의 말이 가 닿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10년 만에 시설에서 돌아온 동민의 말을 남동생은 더 이상 알아듣지 못했다. 소통할 사람이 사라진 집에서 동민은 입을 닫았다.


아버지는 엄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동민에게 “문밖은 위험하니 주는 밥 먹고 집 안에 안전하게 있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서른이 훌쩍 넘은 동민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두렵고 어려운 존재였다. 동민은 자신과 동료들의 활동을 아버지에게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퇴소한 직후 일주일에 한두 번이었던 외출은 날이 갈수록 늘어 2004년부터는 매일이 되었다. 가족들은 동민이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작업장에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에 나가 밤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동민은 가족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가족들도 동민의 하루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걱정할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동민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된 무심이었다.


2006년 어느 날 아침에 멀쩡히 나간 동민이 삭발을 하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제도화를 외치며 삭발 투쟁을 한 날이었다. 가족들은 놀라 이유를 추궁했고 동민은 나쁜 사람들에게 끌려가 머리를 깎였다는 핑계를 댔다. 동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가족들은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조심해서 다니라는 걱정의 말을 보탰다.


부모는 세상에 동민의 자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동민이 시설에 있을 때 부모는 매달 한 번 동민을 집으로 데리고 와 주말을 함께 보내곤 했다. 부모는 그때마다 들었던 담당선생님의 동민에 관한 이야기가 신기했다. 꾀부리는 법 없이 어떤 일이든 끝까지 해낸다는 평,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다는 평, 동민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던 부모에게 동민이 운동 경기에 출전한다는 소식은 의아하기까지 했다. 동민은 경기에 나가 유명 메이커 상표가 붙은 경기복이나 운동화를 받아오곤 했다. 엄마는 동민이 메이커 옷을 타려고 경기에 나가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변변한 옷 한 벌 사준 적이 없던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부모는 동민의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없었다. 표적구 가까이 공을 굴리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한 동민을 본 적이 없다. 경기 중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좌절했던 순간의 얼굴을, 햇볕을 쬐는 나른한 표정을, 술에 취할 때만 나오는 선명한 발음을, 집회 현장에서 자신의 스쿠터로 전경의 방패를 들이받으며 전진하는 동민의 뒷모습을 가족은 알지 못했다.

 

2010년 9월, 우동민 열사가 과거 ‘경기도 장애인 체육대회’에서 받은 메달을 보이며 웃고 있다. 사진 장애해방열사_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하는 동민 씨 

 

2005년 1월 성북센터가 문을 열었다. 이원교, 김기정, 신인기, 이규식, 문애린이 모였고 작은 공간을 얻었다. 이원교는 센터 개소 전부터 신인기를 통해 우동민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동민은 같은 동네에 살던 인기와 함께 집회에 나오곤 했었다. 이원교는 자립생활에 대한 우동민의 열망을 알고 있었고 성북센터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원교는 사무실을 마련한 후 우동민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고 동민은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해 여름, 우동민이 합류했고 다음 해 박현이 들어왔다.


성북센터는 공간을 단독으로 얻을 형편이 되지 않아 장애인문화공간,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와 성신여대 근처 농협 건물 1층에 10평 남짓한 공간을 함께 얻었다. 10평에 놓을 수 있는 책상의 수는 최대 6개였고 한 단체당 2개의 책상을 배정했다. 사무실 가운데에는 공동으로 쓰는 원탁 테이블을 놓았다. 성북센터가 배정받은 책상은 서류 작업이 가능한 활동가가 나누어 썼고 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좁은 공간에 수동휠체어, 전동휠체어, 스쿠터를 탄 12명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었다.


동민에게 갈 곳과 할 일이 다시 주어졌다. 그룹홈에서 나온 후 5년 만이었고 동민이 서른여덟이 된 해였다. 동민은 비상근 활동가였지만 상근자와 마찬가지로 출·퇴근 시간을 지켰다. 동민은 아침밥을 먹고 집에서 나와 해가 떨어져야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우동민의 별명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하는 동민 씨’였다. 동민은 이원교 소장을 제외하고 나이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성북센터 활동가들은 모두 동민을 큰형으로 생각했다. 동민 자신도 책임감을 갖고 부담스러운 일이나 어려운 일을 맡으려고 했다. 집회나 기자회견, 자조모임 같은 외부활동은 본인이 자원했다. 사무업무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중증장애인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내고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장애해방운동가 우동민

 

동민은 그룹홈을 퇴소한 해부터 스쿠터를 탔다. 2000년대 초반에는 스쿠터 타는 사람이 흔치 않았다. 집회 현장에서 스쿠터는 전경의 방패에 맞설 수 있는 좋은 무기가 되어주곤 했다. 동민은 상체 근육이 발달해 체격이 제법 큰 편이었는데 동료 활동가들은 “동민이 형 인상이 좀 되니까 앞에 서요.”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전경들 앞에 서면 동민은 부러 험악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현장에서의 동민은 사무실에서보다 활동적이었다. 우동민은 「장애해방가」를 좋아했는데 늘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투쟁가를 따라 부르며 행진했다.

 

반토막 몸뚱이로 살아간다고 친구여 이 세상에 기죽지마라

삐뚤어져 한쪽으로 사느니 반쪽이라도 올곧게

말뿐인 장애복지 법조항마저 우리의 생존을 비웃고 있다

노동으로 일어설 기회마저 빼앗긴 형제여

 

아 차별의 폭력 눈총을 깨고 사백만의 힘으로 하나로

자 외쳐불러라 해방의 나라 장애해방 참 세상을

아 우리는 뼈아픈 고통의 시련마저

싸워 싸워야 승리하리라


「장애해방가」 (글·곡 김호철/노래 박준)

 

동민의 빨간 스쿠터를 기억하는 사람은 2006년 5월 평택 대추리마을에도 있었다. 동민은 평생 살아온 터전을 빼앗길 위기의 농민들을 위해 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에 동참했다. 진보 장애인운동계의 연대 차원이 아닌 우동민 개인의 참가였다. 김종환은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당시 대추리 투쟁은 운동권이 총집결했던 대규모의 투쟁이었어요. 스스로 활동가라고 생각한 거의 모두가 참가했었죠. 저도 동료 활동가들과 함께 여러 번 갔었어요. 가장 큰 충돌이 있었던 ‘여명의 황새울’ 작전 즈음이었어요. 대추리로 향하는 모든 길이 막혀서 근교를 뱅뱅 돌았어요. 뿔뿔이 흩어져 투쟁하다가 저 멀리서 눈에 익은 빨간 스쿠터 한 대를 발견했어요. 동민이였어요. 동민이를 거기서 보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거든요. 시골은 휠체어로 접근하기가 어려워요. 더군다나 평택역에서 10km 넘게 떨어진 대추리에서요. 중증장애가 있던 동민이는 정말 힘들게 대추리까지 갔을 거예요. 동민이는 자신을 스스로 활동가라고 정체화했고, 잘못된 권력을 상대로 투쟁해야 하는 이유, 연대의 의미를 잘 알고 있던 거예요. 우동민 열사 추모제를 치를 때면 전 늘 대추리의 동민이가 떠오릅니다.”

 

2008년 6월, 동료들과 시설 비리 척결 투쟁에 나선 우동민 열사. 앞줄에 스쿠터 탄 사람이 우동민 열사. 사진 장애해방열사_단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제도화 투쟁 

 

우동민이 활동하던 2005년에서 2010년 사이에는 굵직굵직한 장애 이슈가 많았다. 정립회관 투쟁, 활동보조서비스제도화 투쟁, 석람재단·석암재단 비리 척결 투쟁, 탈시설권리 쟁취 투쟁, 장애등급제 폐지 투쟁 등 동민은 장애인운동 역사의 모든 현장에 함께 있었다. 모든 투쟁에 마음을 다했지만 동민이 가장 긴 시간 함께 했던 활동은 활동보조서비스제도화 투쟁이었다.


2005년 12월 경상남도 함안에 살던 한 중증장애인이 방 안에서 수도관이 터져 동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장애인활동보조는 중증장애인의 생명과 직결된 서비스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2006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단체는 활동보조서비스가 중증장애인의 권리임을 선포하고 활동보조서비스제도화를 요구하며 삭발 투쟁 및 서울시청 등 전국 각지에서 무기한 천막농성을 벌였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활동보조서비스에 대한 책임을 정부에 떠넘기며 면담조차 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서울시는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 건립 예산으로 7천억 원을 배정했는데, 돈이 없다며 그들이 깎으려 했던 활동보조서비스 예산은 고작 15억 원이었다. 2006년 4월 27일 중증장애인들은 기어서 한강대교를 건너 노들섬까지 가는 투쟁을 벌였다. 맨몸으로 한강대교를 기는 중증장애인 뒤편에는 30여 명의 장애인들이 서로의 휠체어를 쇠사슬로 묶고 차량을 막아섰다. 중증장애인들은 거칠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맨몸으로 기면서 자신의 삶과 투쟁에 대한 처절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는 행렬에 우동민이 있었다. 그의 낡은 청바지는 20미터도 채 가지 않아 금세 해졌다. 살이 찢겨 피가 흘렀지만 동민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서울시는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포기하고 활동보조서비스를 전면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각 지방자치단체 역시 하나둘 서비스를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앙정부도 이러한 흐름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고 2007년 1월 보건복지부는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를 전국적으로 시행하기 위한 사업지침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지침이 문제가 되었다. 10% 자부담을 내야 하고, 한 달 이용 시간은 최대 80시간으로 제한되었으며, 차상위 200% 안의 소득 수준의 사람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중증장애인의 권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2007년 1월 24일 중증장애인활동가들은 활동보조서비스의 대상제한 폐지, 생활시간 보장, 자부담 폐지라는 3대 요구안을 걸고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 11층 배움터를 점거, 무기한 집단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우동민은 단식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하루 단식에 동참했고 그 자리를 함께 지켰다. 삭발한 중증장애인들이 곡기를 끊은 지 23일째 되던 날, 보건복지부는 중증장애인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활동보조서비스를 받게 하고 이용시간을 최대 180시간으로 확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4월 활동보조서비스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하지만 자부담금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우동민은 바로 그 자부담 문제로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었다. 뇌병변 1급의 중증장애인이었던 우동민은 당시 월 60시간의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자부담이 부담스러워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보통의 삶을 꿈꾸다

 

동민은 꽃잎과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면 달리던 스쿠터를 멈추고 바라보곤 했다. 커피 한 잔을 스쿠터 앞에 꽂고 동료와 함께 햇볕이 잘 드는 벤치를 찾는 일은 동민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동민은 낭만을 아는 사람이었고 그런 소소한 순간들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우동민 하면 가장 먼저 꼽는 것이 술이다. 술을 마시면 긴장이나 경직이 조금 풀렸고 그런 나른한 느낌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동료들과 서슴없이 어울릴 수 있어 좋았다. 우동민은 말을 함축적으로 담아낼 줄 알았다. 유머를 담아 짧게 툭 던지면 동료들은 박장대소했다. 거기에 술이 좀 들어가면 갑자기 발음이 분명해지면서 가끔 찰진 욕도 튀어나왔다. 동민은 술자리에서의 자유분방함을 사랑했다. 그 사랑이 과해 술에 취해 길 위에서 잠들어 버린 때도 가끔 있었다. 동료들은 동민만 보면 술 좀 줄이라고 구박했다.

 

2009년 10월 24일, 우동민 열사 생일날 동료 활동가들과. 우동민 열사 앞에 초가 꽂힌 케이크와 맥주가 놓여 있다. 사진 장애해방열사_단

동민은 외로움을 많이 탔다. 동민의 집에서 스쿠터로 10분 거리에 있는 신인기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집에 있다가도 술 생각이 나면 스쿠터를 몰고 인기의 집에 갔다. 정작 신인기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동민을 위해 냉장고에 술을 채워두었다. 동민은 인기의 집에 집회가 끝나고 뒤풀이하러 가고, 주말이면 삼겹살 구워 먹으러 가고, 명절에 친척들의 방문을 피하기 위해 갔다.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항상 함께였기 때문에 신인기는 동민과 자신을 ‘바늘과 실’ 같은 관계라고 했다.


2008년 무렵 신인기는 목디스크가 악화하여 목 아래로 마비가 왔다. 수술을 했고 혼자서 해왔던 일들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다. 동민은 수술 후 한동안 집에 누워만 있어야 했던 신인기가 걱정돼 매일 인기의 집을 드나들었다. 동민도 거동이 자유롭진 못했다. 왼손은 경직이 심해 대부분의 일은 오른손으로 해야 했는데 누워있는 인기를 위해 한 손으로 집을 청소하고 소변보는 일도 도왔다. 신인기가 배가 고플 때면 가스레인지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라면을 끓여 먹여주었다.


우동민은 시설에서 나오면서부터 줄곧 자립생활을 꿈꿨다. 신인기가 임대아파트에 입주해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더욱 자립을 소망했다. 우동민은 가족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임대아파트 입주 조건을 만들려면 세대를 분리해 집에서 나와야 했다. 맏아들로서 집에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손을 벌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우동민은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립생활을 계획했고, 활동비를 받게 되면서부터 집 보증금 마련을 목표로 돈을 모았다. 한 달 용돈을 1만 원으로 정했고 나머지 돈은 모두 저금했다.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먹고 커피도 얻어 마셨다. 옷은 접힌 곳이 닳을 때까지 입었다. 우동민은 아끼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마흔이 넘었던 우동민은 결혼해서 가족을 이뤄 살고 싶었다. 가까운 동료들만 아는 사실인데 시설에서 알게 된 한 여성을 오래 좋아했다. 동민은 시설에서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작게 표현하곤 했다. 동민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었다. 퇴소 후에도 그 친구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동민은 자립하고 자리 잡으면 연락할 생각이었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동민은 술에 취해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우동민의 책상 

 

성북센터 사무실에 동민과 인기의 책상은 오랜 기간 없었다. 책상 하나를 더 두려면 그만큼의 공간이 필요했다. 센터 설립 초기는 책상을 둘 자리도 책상을 살 돈도 없었다. 성북센터는 개소 2년 후에 다섯 평 넓혀 독립했지만 이때도 둘의 책상을 마련하지 못했다. 다시 2년이 지나고 살림을 더 키워 20평 정도의 공간으로 이사했고 이원교 소장은 가장 먼저 우동민과 신인기 공동 책상 1대를 구매했다.

 

2006년경,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람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우동민 열사. 사진 이원교


우동민의 개인 책상은 센터 개소하고 5년 후인 2009년 말에 생겼다. 우동민은 자기 자리가 생겼을 때 가장 크게 웃었다. 동민에게 책상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 더 확고하게 이 센터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동민은 더욱 책임감을 느꼈다. 지역에서 보치아 선수들을 발굴하고 자조모임을 만들어 지원하는 업무를 맡았고 더 단단한 책임감으로 집회 현장에 열심히 나갔다.


동민에게 책상과 함께 개인 컴퓨터도 생겼다. 동민은 시력이 안 좋았다. 앞에 있는 사람이나 물체는 흐릿하게 윤곽만 볼 수 있었다. 동민은 안경을 맞추고 싶었지만 당시만 해도 눈에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동민이 시력검사를 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춘 병원이 드물었다. 아니, 스쿠터를 탄 동민을 받아주는 병원이 없었다. 안경은 끝내 갖지 못했지만 컴퓨터로 글씨를 확대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동민이 공부를 시작한 것도 책상이 생기면서부터다. 동민은 한글공부를 시작했다. 동민은 한글을 떠듬떠듬 읽을 줄은 알았지만 쓰지는 못했다. 현장에 나가지 않을 때는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동민은 동료 활동가와 틈틈이 한글을 공부했고 자원봉사자와 초등 검정고시 준비도 시작했다. 동료 문애린의 채근에 못 이겨 서류 보는 연습도 해볼 계획이었다. 동민은 자신의 책상에서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원교 소장은 우동민이 책상을 갖게 된 시점을 이야기하다가 한동안 말을 삼켰다. 그는 긴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 동민이 생각을 자주 해요. 요새 AAC가 나왔잖아요. AAC는 이용자가 기기의 그림이나 문장을 선택하면 음성으로 출력해주는 의사소통보조기구예요.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기계를 이용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거예요. AAC를 잘 활용하는 중증장애인활동가들을 볼 때마다 동민이가 생각나요. 동민이가 살아있을 때, 이 기기가 있었다면 동민이가 얼마나 잘 썼을까? 불과 8년 전이지만 그때만 해도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말을 하거나 글자를 쓰는 수밖에 없었거든요. 동민이는 아무것도 제대로 누려보지를 못했어요.”

 

▷ ③부 옆도 보고, 뒤도 보면 항상 그가 있었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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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미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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