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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할 수 없는 몸’, 노동자라는 ‘성취 지위’를 갈망하다
[연재] 질병과 함께 춤을
등록일 [ 2020년04월15일 18시59분 ]

- “방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거니 작가나 되라고 해.”

 

난 ‘척수성 근위축증’이란 희귀난치성 질환을 지닌 중증장애여성이다. 선천적으로 근육이 약화되고 운동발달이 결여되는 질병을 갖고 태어났다. 세월이 갈수록 몸의 운동기능은 점차 저하되고 질병으로 인한 장애도 점차 심화되고 있다. 내 장애가 질병으로 인한 것임은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 그전까진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증증의 장애가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쟤는 평생 밥벌이도 못 할 텐데 어쩌나. 쯧쯧.”
“방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거니 작가나 되라고 해.”

 

난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에 의해 직업이 정해지고 있었다. 내 의사나 소질이 있고 없고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장애인단체에서 일할 때 연말에 MT 가서 평가회의 하던 내 모습 ⓒ장애인문화공간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부모, 형제와 한방에서 살았다. 손님이 오면 그 방은 지금의 거실과 같은 손님맞이 공간이 됐다. 그래서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여과 없이 듣게 됐다. 애가 들으면 안 된다는 배려에서 나오는 걱정과 한숨의 소곤거림도 꽂히듯이 들렸다. 내 밥벌이에 대한 걱정은 그렇게 처음으로 들려왔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내게 글을 써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설득이 이어졌다. 비장애인과 달리 장애가 있어 내 삶은 남다른 이야기 소재가 되고, 어른이 되면 장애 때문에 취직이 어려우니 작가가 되어 먹고 살라는 거였다. 장애가 있는 삶을 책으로 펴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다른 장애인에게 꿈과 희망을 주면 오랫동안 나에게 희생한 가족과 도움을 줬던 사람들에게 보람도 주고 보답도 하는 것이라고. 고마움을 표현하고 은혜를 갚을 방법은 나한테 그거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내 직업은 작가로 확고하게 정해져 갔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은, 표현되지 못한 내 의사는 ‘싫어’였다. 언제나 마음속에만 머문 대답이었다. 난 그 시절 글짓기 숙제도 몹시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시키는 거라서 할 뿐, 책도 어쩔 수 없이 읽는 거였다. 그래서 갈수록 글쓰기에 대한 거부감은 커졌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글을 쓰고 있는지 궁금해한다고 한다. “은주는 지금도 글 쓰고 있어?”라는 어른들의 안부가 아주 가끔씩 들려온다. ‘내가 스스로 글을 쓰겠다고, 쓴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내 없는 일로 머리가 저어질 뿐이다. 누구도 나에게 묻지 않고 정해진, 내가 꿈꾸지 않았던 직업, ‘작가’는 마흔이 넘도록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 생애 첫 노동과 퇴사, 순순히 오지 않던 첫 번째 퇴직금

 

2005년, 난 학력도 짧고 경력도 없는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 중인 자취생이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한 스펙 없는 서른 살 중증장애인에게 노동의 기회가 찾아왔다. 스물아홉에 입소했던 자립생활체험홈(탈시설 혹은 탈재가 의지가 있는 장애인에게 자립생활을 경험해 볼 수 있도록 거주할 주택과 자립생활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단기 형식으로 운영하는 집)을 운영하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3개월 동안 인턴으로 일해보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주 5일인지 3일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급여는 5만 원이었다. 나도 ‘출근’이란 걸 하게 되는 기회가 왔으니 노동조건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고 싶었으나 오지 않을 거 같았던 ‘첫 출근’을 서른에 하게 되었다.

 

출근해서 하는 일은 자립생활 관련 책을 보거나 회의 참관, 집회 침석 등이었다. 센터 사무실에서 활동지원서비스를 담당하던 코디네이터(아래 코디)가 갑자기 그만두게 되며 내 인턴 기간은 두 달 정도로 단축됐다. 새로 채용할 코디 업무를 인턴이던 내가 하게 된 것이다. 주 5일 근무에 급여는 20만 원으로 바뀌며 상근직이 되었다. 추후 급여는 차츰차츰 올라 이듬해는 최저임금 70만 원까지 받았다. 센터 업무는 갖가지 서류와 절차, 형식이 많았다. 생소한 업무와 용어를 빠르게 익혀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에만 몰두했다.

 

실무를 파악하고 익히기 급급한 날들이 지나 일의 흐름이 익숙해지니 사람과의 관계가 뜻밖의 걸림돌로 나타났다. 센터 사람들은 두 파로 나뉘어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았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하나둘 사표를 냈다. 나도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합니다’는 사표를 쓰고 1년 넘게 재직한 곳을 나오게 됐다.

 

하지만 내 생애 첫 퇴직금은 순순히 내게 오지 않았다. 센터는 중증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급여도 줬으니 퇴직금은 지급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나보다 앞선 퇴사자들에겐 퇴직금이 지급됐는데 나에겐 줄 수 없다니, 이대로 수긍할 순 없었다. 노동부에 퇴직금 미지급 신고를 해서 받아냈다. 순탄치 않은 과정이었다.

 

- 진보적 장애인운동과의 만남, 낯설었던 ‘활동가’로서의 삶

 

퇴사 후 몇 달간 구직활동을 적극적으로 했지만 갈 곳을 찾지 못하던 중 누군가의 소개로 재취업을 하게 됐다.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하는 문화단체였다. 센터에서는 노동자를 직원이라고 칭했는데 이곳에선 ‘활동가’라고 칭했다. 3개월 반상근으로 인턴을 하고 이후 ‘상근 활동가’라고 불리게 됐다.

 

‘사회 활동이나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실천하는 사람’을 이른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는 활동가라는 정체성은 나와 맞지 않는 거 같아 들을 때마다 몹시 어색했다. 사회나 정치 활동에 대한 고민을 해오지 않았기에 ‘활동가’란 호칭을 들어도 되는 건지 계속 자기 검증을 하게 되고 스스로 위축되기도 했다. 활동가로서의 활동에 대한 고민과 투쟁현장에서의 이질감은 늘 동반되는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로서 외부에 목소리를 내는 일을 하다 보니 점차 어색함은 옅어졌다.  2006년에는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다 사흘 만에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고,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관련 일을 하게 되며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문화로 표현하는 다른 운동 방식도 경험하는 등 성장의 시간도 갖게 되었다.

 

여러 고민 끝에 2008년 퇴사 후, 실업급여가 나오는 동안 구직활동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실업자가 된 후 늦잠을 실컷 자고 실업급여 받으며 생활비 걱정 없이 푹 쉬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실업급여 수급기간이 끝나지 않은 2009년 4월이 오기 전 활동제안을 받고 면접을 봤다. ‘왜 벌써 일을 하려 하냐, 왜 빡센 곳으로 가려 하냐’는 만류를 많이 듣게 됐지만 난 출근하고 있었다. 사실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별게 아닌 호기심이 생겨서였다.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이끌어 온 중심지는 어떤 단체일지 그 속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면접 시 ‘투쟁사업도 많고 외부 일정이 많다. 그리고 집회, 농성의 현장을 적은 인원의 활동가가 책임지고 집행하기에 사무국 비는 날은 부지기수고 일은 엄청 빡세다. 개인 활동가마다 담당하는 업무량도 많아 신입, 중증장애에 대한 배려가 부족할 수 있으니 기대하지 말고 혼자 일을 찾아 나가고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다’란 말을 듣게 됐다.

 

나로서는 낯가림이 많은 성격이라 왁자한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웠기에 삭막한 게 더 괜찮았다. 뉘앙스나 내용은 다를 수 있겠지만 중증장애가 있는 동료 몇몇과의 술자리에서 푸념처럼 뱉는 말 중 하나가 면접 보러 갔더니 ‘중증은 어렵다’는 말을 대놓고 들었다는 게 생각났다. 그러나 그 장애인단체들을 비난하기 어렵다. 터무니없이 적은 단체 재정과 적은 활동가로 여러 투쟁도 하고 일상 사업도 해야 하고. 빨리 장애인권현실을 개선시키는 게 시급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장애인의 쌩쌩한 속도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출근해서 묵묵히 담당 업무하고 틈틈이 알아서 일거리 찾아 정리해놓고 눈치껏 다른 일도 맡으며 활동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업무량은 어디나 해가 갈수록 늘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사무총국 회의는 퇴사 때까지 고역의 시간이었다. 언제나 당위성으로 밀어붙이고, 현실적 어려움으로 불가능함을 얘기하고, 자신의 의견 없이 결정 난 대로 실행하겠다는 이 세 가지 의견은 거의 매번 고집스럽게 나타나 기 싸움을 해야만 했다. 회의는 그렇게 기가 빨리는 시간이었다.

 

사무실이 이사하며 건물 한 층에 여러 단체가 빽빽이 공간을 나뉘어 쓰게 됐다. 사람은 많고 화장실은 남/여 각각 하나라 줄을 서게 되니 화장실도 맘 편히 이용하기 어려웠다. 출근해서 한 번 가는 화장실은 활동지원사 퇴근 시간인 오후 4시 전에 되도록이면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퇴근해서 집에 갈 때까지 갈 수 없었다. 어쩌다 활동지원사 없을 때면 동료에게 부탁해서 가긴 했지만.

 

중증장애가 있어 어릴 때부터 화장실에 가는 건 서로에게 불편함이었다. 그래서 대소변 배설을 통제하는 게 습이 되었다. 그 통제의 연차는 배뇨 지연과 변비가 되어 화장실에서 걸리는 시간이 남들보다 꽤 길어지게 됐다. 더불어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휠체어에 편한 자세로 앉기 위해 체위 변경하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그러다 보면 기본 30분 이상이었다. 이런 상황을 알 리도 없고, 알리지도 않았으니 눈치껏 사무실 밖 화장실을 찾아 구청, 지하철역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면 1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거였다.

 

소리, 사물, 사람이 만들어내는 북적거림과 산만함으로 사무실에선 이어폰으로 귀를 닫고 일했다. 공간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불편함은 업무보다 더 큰 스트레스가 되어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져 갔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업무용 단체 카톡방은 꽤 심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가중되는 일로 한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다 지친 걸까? 활동을 그만두고 싶어졌다.

 

안식월 3개월을 보내고 다시 이야기하는 조건으로 쉼에 들어갔다. 석 달이 채 되기 전 복귀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다시 출근하게 되고 힘듦을 버텨내는 몸과 마음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아 2013년, 소속된 모든 활동을 정리하고 백수로 돌아가 이사도 하고 핸드폰 번호도 바꿨다. 꽉 막힌 내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은 일상을 보내며 숨을 골랐다.

 

현관에서 나의 외출을 기다리고 있는 전동휠체어 ⓒ배미영
 

- 장애인야학에서의 자원활동, 발달장애인과 만나다

 

3년여의 시간 동안 사뿐사뿐 돌아온 생기는 또 무언가를 시작하게 했다. 장애인단체에서 활동하며 알게 된 장애인평생교육기관에서 잠시 자원활동을 하게 됐다. 낮 2시 문해·초등반 수업을 시작으로 공통수업-도예·미술 등-이 이어지고, 저녁에 중·고등반 수업으로 끝나는 야간학교였다. 학교에 오시는 분들은 발달장애인, 지체장애인, 정신장애인, 배움의 기회를 놓쳐 만학의 길을 걷는 비장애인 등 여러 모습이었다.

 

사무와 초등반 수업을 맡기로 한 난 오전 11시쯤 출근해서 수업내용을 준비했다. 점심을 먹고 학생들과 활동지원사들이 오면 인사를 나누고 자원교사들과 모둠을 나눠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학생 또는 활동지원사 또는 자원교사 상담이 기다리고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이어지는 수업들을 챙기며 상담도 하고 틈틈이 사무도 보았다. 학교는 수업시간 이외에도 많은 말을 필요로 했다. 쓰레기 분리수거 방법, 화장실 에티켓 등 소소한 것도 찬찬히 반복적으로 설명할 일이 많았다. 이 또한 일상의 배움이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 부분이기도 했다.

 

1년 반 정도 활동했던 장애인평생교육기관은 일하며 가장 많은 말을 했던 활동이기도 했고 마지막 일터이기도 했다. 또 지금까지 활동하며 직접적으로 마주치지 않았던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삶에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 마흔에 맞이한 ‘노년의 일상’에 집중하기  

 

지방에서 재가장애인으로 지내던 시절엔 노동자라는 성취 지위를 얻는 게 중증장애인에겐 당연하지 않았다. 복권 당첨 확률같이 느껴질 만큼 현실감 없는 바람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난 노동을 갈망했고 서울에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올라와서야 ‘노동’과 만나게 되었다.

 

30대와 40대 초반까지,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나는 노동자로 살았다. 출퇴근, 휴가, 실업급여, 퇴직금, 4대 보험 등 나와는 무관할 거 같았던 활자는 일상에 들어와 경험이 되고 추억이 되었다. 노동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배우고 익히는 노력과 어쩌다 있던 휴일을 잠으로 채우기 급급했던 날들 또한 추억이지만 고된 노동이었다.

 

일에 파묻혔던 30대 중반, 활동가의 강도 높은 노동이 버거워지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마흔이면 내 몸의 나이는 노년이 올 거라 생각됐고 그전까지는 일을 하며 경제활동을 해서 노년을 준비해야 했다. 준비가 됐다고 생각된 시점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갈망했던 노동이 족쇄가 되어 나를 옥죄여와 백기를 들어 노동을 놓고 백수로 돌아왔다.

 

백수가 되어 심심하게 살게 될 줄 알았으나 일상은 늘 바쁘게 돌아간다. 매일 한결같이 활동지원사 세 명을 맞이하고, 가족, 친구들과 갖는 시간도 늘어나 사람들 속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던 일상이 보송보송 잘 마른 솜이 되어 가볍다. 내 남은 노년이라 칭하는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게 과제이자 일이다. 나는 이제 그것에 집중해보려 한다.

 

글쓴이 소개
은주 _ 다른몸들(준)의 질병서클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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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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