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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배제는 가부장제가 되었다
[칼럼] 변재원의 뒤틀린 몸과 사회
등록일 [ 2020년04월16일 20시13분 ]

좀처럼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 몸을 움직이는 어떤 동작을 취하더라도 왼쪽 발끝이 감전되는 듯한 고통과 경련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특히 앉아서 하는 동작이 아닌 선 채로 움직이는 동작일수록 신경통의 강도는 더 생생하고 크게 다가온다. 가장 심한 통증을 느낄 때는 허리를 숙일 때이다. 무언가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일 때면 허리가 접히는 느낌이 들지 않고 발가락이 접히는 느낌을 받는다. 내 모든 일상 감각은 통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내 모든 행동이 통증의 계기이고, 내 모든 생각이 통증 유발의 이유가 된다.


나는 지금 매일 통증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고, 오직 몇 시간 잠들 때 유일하게 통증의 감각으로부터 한시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데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결국 수면 시간을 제외한 모든 일상의 유지는 곧 신경통을 수반한다.

 

지속적인 통증을 마주하는 환자들은 저마다 통증의 익숙함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단어를 활용한다. 몸과 통증의 관계에서 많은 이들이 언급하는 개념은 ‘반성’과 ‘친해지기’이다. 이들의 증언은 보통 통증이 저마다의 인생을 돌이켜보도록 하는 반성적 계기가 된다거나, 통증이 몸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게끔 만들어 몸과 마음의 친해지기를 매개하는 감각이 된다는 교훈을 갖는다. 그러나 나는 나의 몸에 대한 고통을 그다지 교훈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생각해 본 적 없다. 통증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여 희망적으로 해석하지도 않는다. 내 몸의 통증이 내게 어떤 가르침을 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통증으로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기대도 갖지 않는다. 몸의 통증은 신경생리학적 증상이자, 장애로 인한 하자일 뿐이다.

 

빨간색과 노란색의 물감이 뒤섞여 있다. 사진 Ruvim Noga on Unsplash

 

평소의 나는 통증 감각을 회피하기 위해 좀처럼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구태여 움직이면서까지 이 통증을 감내해야만 하는 이유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통증을 이겨내는 전략은 이게 전부다. 그저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면 된다. 1살 때부터 장애인이었던 나는 어릴 적부터 ‘움직이지 않기’ 전략을 취해왔고, 몇 년 전 교통사고를 겪은 뒤 통증 감각이 더 커진 후로는 ‘더 움직이지 않기’ 전략을 취하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그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내 몸과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고, 내가 장애인임을 잊는다.


통증을 갖고 살아가면서 나는 일찍부터 자발적인 차별과 배제를 사회에 요청해왔다. “내 몸과 마음이 안정을 찾고 싶으니, 나를 빼고 참여하시면 안 될까요?” 이는 아무리 점잖게 말한들 결국은 ‘열외당하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이고, 활동으로부터 나를 ‘배제해달라’는 요청이며, ‘차별을 용납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내 가족들은 내 부탁에 응했다. 온갖 집안일에서 나를 열외로 하고 배제했으며, 제사상을 차리는 데도 나를 호출하지 않았다. 명절날 고향 방문도 가족 중 오직 나에게만 유일하게 참석 여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있었다. 아프다는 이유로 가지 않아도 됐다. 학교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께서 “너는 몸이 아프다 하니 체육 시간에 교실에 앉아서 책 읽고 있어”라고 하거나, “너는 몸이 아프다 하니 학급 청소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당연히 듣고 살았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동정과 호혜가 많은 사람들일 수록 예외적인 나에 대한 열외 조치를 더욱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편의를 제공했다. 그래서 나는 굳이 수고스러운 일에 대해 얼굴을 비치지 않아도 됐다. 나는 오직 몸과 마음의 안정에 온 정신을 쏟고, 최대한 고통을 피하기만 하면 됐다. 나는 배제에 길들여지기를 원했고, 조치가 취해지면 언제나 만족했다.


그러나 영원히 내 몸과 마음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음을 얼마 전에 깨닫게 되었다. 나의 고통이 타인에게 전이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결혼생활이 그 계기가 되었다.

 

- 내가 피한 몸의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침투했다
 
4년 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결혼에 앞서 1년간 동거했던 기간을 합산한다면 그와 함께 산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사랑하는 가연과 나는 언제나 말이 잘 통했고 생각이 잘 통했다. 우리의 대화는 늘 편안했고 부드러웠으며,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웃는 모든 시간이 행복했다. 관계에 있어 끈끈한 정신적 교감과 연대감을 나누고 있었다. 주변인들은 우리 부부를 부러워했고 또 응원해주었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아주 평탄하고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지속하고,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과 비장애인 부부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결혼생활 24시간 모두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가연이 점차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인내하는 강도는 더욱 커졌다. 가연은 결혼 생활 중 떠맡게 되는 집안일과 돌봄의 문제에 있어 단지 자신이 ‘여성’이라 떠안게 된 것인지, ‘비장애인’이라 떠안게 된 것인지,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그로 인해 언제부턴가 우는 횟수도, 짜증 내는 횟수도 잦아졌다. 우리 결혼생활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가사를 분담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언젠가 다툼이 있었을 때, 그는 내게 이런 식으로 말했던 적이 있다. ‘나는 지금 너무 힘들다. 내가 너를 사랑했어도, 결혼은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내가 가사를 도맡게 되는 당연한 상황이 너무 힘들고, 내게 가사를 방치하는 네게 화가 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어서 혼란스럽다’고 말이다.


나는 얼굴이 빨개졌고, 화를 버럭 내며 맞받아쳤다. ‘나는 결코 네게 가사를 전가한 적 없고, 의도하지도 않았다’라고 말했다. 나는 남성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어서 그랬던 건데.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몸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허약하고 건강하지 못한 내가 왜 ‘가부장’이 되는 것일까. 가연과 다투는 그 순간에는 너무 섭섭하고 부끄럽고 화가 났다. 차라리 건장한 한국 남성이었다면 그런 소리를 들어도 덜 억울할 것 같았다.


한 차례의 불같은 다툼이 있고 난 뒤, 냉담해진 서로의 관계에 대해 한참 혼자 생각해보았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내 몸과 내 처지를 벗어나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그제야 나의 행동이 가연의 고통을 유발시킨 근본적인 문제임을 파악했다. 내가 스스로 아픈 몸에 집착하는 동안 나는 온갖 참여로부터 스스로를 배제하고 있었다. 나는 그 배제에 길들어져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도 스스로 배제된 위치에서 꿈쩍하지 않았으며, 나를 ‘움직이지 않는 장애인’으로 정체화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내 안의 길들여진 배제가 가부장제를 낳았다. 내 안의 안식과 평화에 잠긴 사이, 내 몸을 피해간 고통은 상대의 몸과 마음속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 내가 고통스럽지 않은 길을 택한 그 대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짊어져야 할 고통의 무게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몸의 고통에 집중한 나는 허리 숙여 쓰레기를 줍고, 허리 구부려 설거지하고, 쪼그려 앉아 분리수거하고, 하수구 속 음식물 쓰레기를 집는 모든 가사 노동을 파트너에게 떠넘겨 온 셈이다. 성인 남성의 몸을 갖지 못한 장애인이 다른 모습의 가부장제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돌봄 제공자를 착취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한심하게도 나는 내 몸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착취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난처하고 부끄럽고 민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 당사자로서 고백하고 싶었다. 나의 고통을 부정하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전이하는 장애인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스스로 마주 하고 싶었다.

 

늦었지만 지금에서야 천천히 가사노동을 배워나가고 있다. 리어카를 끈 채로 목발을 짚어 분리수거 물품을 옮기고, 목발을 바닥에 던진 채 주저앉아 바닥 청소를 하고, 키 높이가 맞지 않아 바닥이 물로 흥건해지는 어설픈 설거지를 하면서 몸의 고통을 마주하고 있다. 내 고통을 사랑하는 이에게 떠넘기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서른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는 것이 스스로 한심하고 부끄럽다. 미안함이 가장 크다.

 

변재원의 뒤틀린 몸과 사회

 

초보 활동가. 투쟁의 현장에서는 활동가들에게 먹물 같다고, 인터뷰 현장에서는 시민들에게 말이 험하다고 놀림당하기 일쑤. 뒤틀린 몸과 말을 끝까지 지키는 활동가가 되기를 소박한 목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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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원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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