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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온전하지 않은 이들’의 자유를 위하여
『중동태의 세계-의지와 책임의 고고학』, 고쿠분 고이치로
[연재] 노들장애학궁리소 ‘마이너의 서재’
등록일 [ 2020년04월29일 18시53분 ]

노들장애학궁리소는 장애인운동단체의 진지인 ‘대항로’에 있으며, 장애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곳이다. ‘궁리’를 통해 장애를 규정하는 근거에 대해 바닥까지 따져 묻고, 장애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억압하는 온갖 삶의 형식을 부수어나갈 운동의 지혜와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 강좌, 세미나, 차담회 형태로 해 오던 궁리 외 또 다른 방식을 궁리하다가 연구자들이 매달 돌아가며 장애와 관련한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로 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정상성 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받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도 담으려 한다.

 

누가 능동적 주체란 말인가?

 

정상과 병리, 성숙과 미성숙, 자립과 의존 등 오늘날 소수자 담론에서 주요하게 논의되는 대립쌍 상당수는 능동-수동 프레임과 긴밀히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행위로 옮길 수 있고, 그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한,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능동적 주체란 말인가? 다음 사례를 살펴보자.

 

“발달장애인 A는 지난 총선에서 투표를 했다. 그러나 A는 글을 읽지 못하며 뉴스의 내용도 혼자서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선거에 관한 정보를 얻는 데 큰 제약이 있다. 더군다나 그는 날짜를 헤아리는 방법도 잘 몰라서 선거일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이에 A의 비장애인 친구 B는 투표 며칠 전 A에게 선거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쉽게 전달해 주었다. B는 선거일에 A와 투표소를 함께 방문해 투표 과정 전반을 지원하기도 했다.”

 

여기서 A는 온전한 시민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가? ‘A가 투표를 했다’는 문장은 분명 능동태 형식이다. 그러나 A의 투표행위는 B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수동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회의 온전한 시민 자격의 통념에 심히 경도된 이라면, 아마도 그는 A의 강한 의존성에, 그러므로 실은 A의 철저한 수동성에 더 주목할 것이다. 즉 A의 주권자 자격은 능동-수동 프레임 안에서라면 언제든 의문에 부쳐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 B는 어떠할까? 얼핏 보면 B는 의심의 여지 없이 능동적 시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B 역시 여러 조건들 및 타인의 행위들에 영향을 받고 있다. 주어진 정세, 계급적 조건, 삶의 역사, 그가 맺는 각종 권력 관계들, 언론 등을 비롯해 그가 A를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실행하기 전부터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있던 두뇌 상태와 신체적 조건 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B는 A의 투표를 지원하면서도 많은 변화를 거쳤을 수 있다. B의 능동적 지원행위란 동시에 A에 의한 B의 수동적 전환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확장해 가다 보면 능동-수동이란 무 가르듯 가를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특정 행위에서 능동과 수동 여부를 단답형 질문의 대답마냥 단정 짓거나, 거기에서 능동과 수동의 양을 측정하여 둘 중 무엇이 더 많다 적다 단언하는 것 역시 도무지 가능해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능동적 주체의 자격을, 그러므로 ‘정상인/성숙한 시민/자립적 인간’의 자격을 갖추었단 말인가?

 

『중동태의 세계-의지와 책임의 고고학』, 고쿠분 고이치로, 2019. ⓒ동아시아
 

중동태의 고고학: 능동태-수동태의 대립 바깥에서

 

혹자는 이 지점에서 인권의 보편성에 의거해 A든 B든 천부적으로 능동적이고 자립적인 시민 자격을 타고났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손쉬운 결론은 때로 진실을 감추는 법이다. 이 사태를 마주하면서는 더 근원적인 질문을 충분히 던져볼 수도 있다. 왜 위 사례를 굳이 능동-수동의 틀을 가져와서 읽어내야 하는 걸까? 이 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틀 바깥에서 이 틀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는 언어 구조에 대한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언어 구조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때로 그 언어가 저도 모르게 은폐하는 현실을 마주할 수 없게끔 한다. 언어 표현은 세계 자체가 아님에도, 언어는 자신의 법칙 내에서 표현되는 것들을 세계 그 자체인 양 쉽게 포장하곤 하기 때문이다. 모든 표현을 능동태, 수동태로 환원하는 우리의 언어 구조는 어떠할까? 세계는 사실 능동태-수동태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는데, 능동태-수동태의 언어는 그 사태에 도달하는 것을 끊임없이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가?

 

고쿠분 고이치로의 『중동태의 세계-의지와 책임의 고고학』은 이런 문제의식을 심화시키기에 적절한 책이다. 더불어 이 책은 알코올 및 약물 의존증 환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기획된 만큼, 장애학 담론들이 주의 깊게 볼만한 요소들을 일정 부분 포함한다(참고로 이 책은 일본에서 인문학계는 물론이고 의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의존증은 흔히 자신의 능동적인 노력을 통해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할 것, 즉 개인의 의지 및 책임 문제와 긴밀히 연관된 병리적 상태로 여겨지는데, 저자는 이러한 시각에 대하여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질문을 던지고자 하기 때문이다. 혹시 주체(주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언어, 즉 ‘능동태-수동태’의 문법을 포함하는 언어가 세계에 대한 사고를 제약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은폐하지는 않는지 끈질기게 파고들면서 말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개념이 바로 중동태다. 그러나 중동태의 도입은 능동태-수동태 간의 절충지점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얼핏 보면 중동태란 그 용어에서부터 능동태와 수동태의 중간쯤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저자가 밝히듯 능동태와 수동태의 절충지점을 찾는 것은 사실 여전히 능동태-수동태의 프레임 안에 갇혀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프레임을 더 강화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이 프레임을 넘어선 언어 체계를 모색하고자 하며, 이러한 그의 계획은 실제로 이 책에서 상당 부분 성취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중동태가 저자의 발명품인 것은 아니다. 일부 언어학자나 고전연구자들을 제외하면, 이 개념은 그 자체로 신비로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중동태는 과거의 문법적 요소로 분명 실재했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의 부제 ‘의지와 책임의 고고학’이라는 말에 걸맞게 그간 망각되어 온 중동태의 전모를 밝히는 작업에 착수한다. 고대 언어들의 문법에서 중동태를 발굴하고, 그것이 쇠퇴해가는 과정을 언어학적으로 기술해 가면서 말이다.

 

중동태란?: ‘행위자’에서 ‘사건’으로

 

이 책에 따르면,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 이전에는 능동태와 중동태의 대립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처음부터 중동태로 불리지 않았다. 그것이 중동태로 불린 것은 최초의 문법책이 쓰일 때에 이미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수동태-능동태가 이렇게 언어구조의 기본문법으로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아 실은 더는 중동태가 활용되지 않는 듯한 현재의 언어들에도 중동태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영어단어 sell, handle과 같이 자동사처럼 활용되는 타동사들이나 비인칭 동사, 재귀적 표현 등이 대표적인 예다. 수동-능동의 틀을 넘어서고자 했던 하이데거, 들뢰즈, 데리다, 아감벤 등에 의해 그간 억압되어 있던 중동태적 문제의식이 현대에도 종종 회귀하기도 했고 말이다.

 

독자들이 이 “억압받아온 것의 회귀”를 마주하면서 특히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능동태와 중동태의 대립이 능동태와 수동태를 나누는 기준과 다르다는 점이다. 고이치로가 아렌트의 의지 개념에 대한 해석을 통해 밝히듯, 중동태를 문법적 요소로 포함하는 고대 그리스어에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의지 개념 자체가 없었다. 능동태와 수동태를 나누는 기준이 주어의 의지 및 책임과 긴밀히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는 고대 그리스가 오늘날의 능동태-수동태적 언어와 매우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오히려 능동태와 중동태는 능동태-수동태에서 그러하듯, ‘주어가 하느냐, 당하느냐’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주어가 ‘동사의 과정 바깥’에 있는지, 아니면 ‘과정 안에 있는지’에 따라 나뉜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어 중동태 동사 “‘욕구하다(Boulomai)는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에서 발원하는 것이고, 주어는 이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라고 할 때, 그것은 생성 과정 속에 있다.” 반면 “중동태와 대립하는 능동태에서는 주체가 소홀히 여겨진다. ‘능동성’이란 단지 과정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어서, 우리가 예컨대 ‘주체성’ 같은 단어로 상상하는 의미와는 현저히 괴리되어 있다. 인도-유럽어에서는 ‘존재하다’도, ‘살아가다’도 ‘주어로부터 출발하여 주어 바깥에서 완수되는 과정’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106~108쪽) 오늘날 언어에 익숙한 이들 입장에서 보면 이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태의 활용이지만, 마찬가지로 고대인들 역시 오늘날의 능동태-수동태를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중동태는 점차 쇠퇴해 간다. 저자 역시 이 쇠퇴의 과정을 여기에 상세히 적진 않지만, 적어도 그는 이 과정이 “‘사건을 묘사하는 언어’에서 ‘행위자를 확정하는 언어’로 이행해온 역사로 그려낼 수”(208쪽)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밝혀 둔다. 저자는 이를 “사건이 사유화(私有化)되어 가는 과정”으로 평가하며, 이로써 행위가 어떤 주어에 귀속되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언어가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 본다. 즉 특정한 언어 구조가 ‘근대적 주체’의 형성과 재생산에 복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현재의 언어는 주체가 능동적으로 행위했는지, 수동적으로 작동했는지를 ‘심문하는 언어’이다.”(216쪽) 그리고 이러한 언어는 주어에 자리한 개인에게 사태의 전적인 책임을 부과하는 사고를 일반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어떤 사태가 능동태 문장으로 표현되었을 경우, 그 문장의 주어에 위치한 이의 의지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사고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 책이 주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언어가 ‘책임을 떠맡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는 이들의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자격 박탈을 정당화할 수 있음 역시 분명하다.

 

제21대 총선 사전선거 날인 지난 4월 10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화영 서울피플퍼스트 활동가가 발달장애인 참정권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그 옆에 그림투표용지 예시를 들고 있는 가오나시 캐릭터가 서 있다. 사진 강혜민
 

서두에서 언급한 사례로 되돌아 가보자. A의 투표사건은 능동태-수동태의 언어 체계 바깥에서 생각해보자면, 단지 하나의 투표사건일 뿐이다. 어쨌거나 능동태 문장으로 표현되는 ‘중증 발달장애인의 투표 사건’은 다양한 관계망 사이에서 온갖 타자들과의 상호작용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며, 그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사건의 의미는 굳이 ‘주어로서의 행위자’가 능동적인지 수동적인지 여부를 통해 밝혀질 필요가 없다. 도대체 왜 발달장애인의 능동적 시민 자격을 물음에 부쳐야만 하는 것일까? 주체의 자격에 대한 심문 없이 그 사건 자체의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그러나 능동태-수동태의 문법에 익숙한 언어 체계는 이러한 사고를 암묵적으로 금지하는지도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능동태-수동태의 언어로는 이 사태를 온전히 표현할 수조차 없다. 이런 차원에서 현 언어는 ‘온전한 인간’의 기준이 능동적 의지 내지는 홀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의 소유 여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형성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은폐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온전하지 않은 이들의 자유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과거로의 무모한 회귀를 감행하거나, 중동태적 프레임에 맞춰서만 사고할 것을 권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의 의도는 다음의 문제의식으로 압축될 수 있겠다. “언어 체계의 고정된 ‘태’에 맞추어서만 세계를 마주한다는 건 얼마나 편협한가?”

 

그럼에도 ‘행위’의 책임 소재로서의 ‘행위자’를 추궁하는 것은 억압자의 행위들에 책임을 묻고 피억압자들의 비판적 내지 저항적 시민 주체로서의 자각에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혹자는 이러한 고이치로의 작업이 자유의 축소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는 여전히 자유를 개인의 의지와 책임의 틀과 연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반론을 예상이라도 하듯, 저자는 책 말미에 ‘의지의 자유’와는 다른 또 다른 형태의 자유 개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스피노자적인 자유 개념이다. 물론 저자가 지적하듯, 스피노자는 중동태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끝내 능동-수동 개념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 와중에도 능동, 수동을 넘어선 인간의 자유 개념을 정립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의지는 결국 외부에 원인을 갖는 것이며, 따라서 행위주체를 ‘온전히 능동적인 존재’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자유의지란 부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의지 차원에서 자유를 논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외부의 영향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면서도 거기에 전적으로 점령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 변화에 맞춰 자신의 역량을 확장해 갈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자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개체는 일방적으로 외부 영향을 수용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힘을 가지고서 외부 영향의 수용 과정에서 자신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더 좋게 변화시켜 갈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적 자유를 마주할 때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역량 확대란 외부의 영향과 그 영향이 자신에게 관철되는 법칙에 대한 인식과 긴밀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관철하는 필연적인 법칙에 입각하여 그 본질을 충분히 표현하면서 행위할 때 우리는 자유로운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세계가 중동태 하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자유로워지기 위한 길이다. 중동태의 철학은 자유를 지향한다.”(314쪽) 그렇다면 이 책에서 참된 인식을 가능케 해주는 능력인 이성의 탁월성은 자유의 근거로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발달장애인 A에게도 충분히 유효한가? 혹시 이러한 형태의 자유는 ‘자격 있는’ 개인들과 ‘자격 없는’ 개인들을 분할하는 또 다른 기준으로 작동할 수 있지는 않을까? 마침 스피노자의 저서 『에티카』의 끝자락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고귀한 모든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

 

그렇다면 ‘고귀하지 않은 이들’의 자유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자신을 관철하는 필연적 법칙을 인식하지 못한 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역량을 확장할 수 있는 관계를 조건적으로 마련받는/마련하는 것, 그 과정 자체가 혹시 온전하지 않은 존재들에게는 저도 모르게 자유를 실현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데 실은 이 역시 어떤 차원에서는 스피노자적이다.)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총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수많은 A들은 일반적인 국민 정서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거기에 점령당하지 않고, 동지들의 조력과 함께 거리를 행진했다. 이 자유의 공간을 단지 능동-수동의 프레임으로 사고하는 바로 그 순간, 얼마나 많은 관계의 가능성들이, 얼마나 많은 의미 창출의 가능성들이 삭제되고 말 것인가? 이러한 차원에서 능동태-수동태를 넘어서 사고한다는 것, 즉 우리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곧 그 자체로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을 여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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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msophist1@gmail.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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