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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제강간 연령기준 문제, 교차성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
[이슈페이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등록일 [ 2020년05월08일 11시24분 ]

1. 문제설정(problematization)의 정치

 

미국 이민자이자 유색인 페미니스트 작가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암 투병을 하며 집필한 자전적 수필 <암 일기>(Cancer Journals)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종주의, 이성애주의, 흑백분리주의와 싸우는 것은 나에게 암과 싸우는 것과 동일하게 시급한 문제다.” 1970년대 미국 백인 중심의 페미니스트 그룹은 출산관련 의료기술과의 관계에서 개인의 몸의 자율성과 자기 통제에 중점을 둔 재생산 건강 운동이 ‘모든’ 여성을 위한 가장 급진적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대 미국 유색인 페미니스트들은 유색인 여성에 대한 우생학적 강제 불임시술과 인종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자신들의 재생산 건강 확보에 가장 핵심이라고 문제설정 했다.1) 이렇게 문제의 ‘우선성’을 누가 어떤 시각으로 설정하는가는 자체로 매우 정치적인 문제다.

 

‘성범죄물 광고·구매도 처벌…의제강간 연령 16세로 상향’ 지난 4월 23일 보도된 KBS뉴스 영상 캡처. 자막에는 “의제강간 연령 13세에서 16세 미만으로 상향”이라고 쓰여 있다.
 

법무부는 지난 2020년 4월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성범죄로부터 아동·청소년에 대한 보호를 근본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국민적 요구를 적극 수용”하겠다며 “미성년자 의제강간 기준연령을 기존의 13세에서 16세로 상향”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시했다. ‘n번방’ 사건이 불러온 집단적 분노와 당혹감은 정부관료, 전문가들이 앞 다투어 의제강간 연령기준 상향이라는 ‘해법’을 내놓는 것으로 모아졌고, 마침내 4월 29일 해당 법률 개정안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의제강간 연령 이슈는 물론 이번에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법의 적용을 받는 직접적 당사자인 청소년들이 많은 우려를 표시해 왔다는 사실, 그리고 법률 일반에서 성관계의 동의/동의능력(행위능력)에 대한 판단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소년법(‘촉법소년’ 연령기준은 하향조정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을 비롯한 타법과의 관계까지, 까다로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이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충분한 논의는커녕 대화 시도조차 없었다.

 

일각에서는 전 세계적인 의제강간 평균연령에 비해 한국의 13세가 예외적으로 낮다는 점을 들어 위의 까다로운 쟁점들에 관한 토론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그러나 의제강간 평균 연령기준이라는 표면적인 비교만으로 과연 충분하다 할 수 있을까? 외국의 의제강간 연령기준이 본래 입법 취지를 전복하는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논의도 이미 많이 나오고 있다. 단적인 예로, 청소년에게 강간을 당한 성인 피해자라는 상황은 성립이 불가능해진다. 그리하여 청소년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이유 때문에, 성인 강간 피해자(주로 ‘여성’)는 형사법상 피의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2)

 

장애인이나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 사건은 그야말로 ‘사건’이 되어 엄청난 공분과 분노, (피해자에 대한)연민 등의 정동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 경우라 하겠다. 장애인 및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때, 그리고 사회적으로 충분한 논의 없이 가장 ‘손쉬운’ 해법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등장할 때마다 당사자뿐 아니라 많은 관련자들이 우려를 표했다. 과연 그것이 그토록 ‘처참한’ 피해 당사자들의 시각에서 가장 시급하고 긴요한 문제일까를 질문하고 토론하고자 했다. 무엇을 ‘문제’로 구성하는가는 상이한 사회적 요소와 집단들이 동시 개입하는 담론적 의미화의 과정이다. 이는 실존이나 현실 그 자체와는 동떨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담론적 수준에서는 어느 것 하나가 배타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중립적이거나 상대적인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문제적일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인식의 주체로서 모든 인간에게는 언제나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다른 사회적 집단의 사고나 체험에 상호 개입하려 노력할 때 정치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것이 ‘교차성’의 정치가 가능한 기본 전제가 될 것이다.

 

다시 질문해본다. ‘n번방’ 사건을 두고 지금 우리들 스스로에게 가장 시급한 질문과 논쟁은 무엇인가. 기왕 아동·청소년의 성적 권리나 인권에 대한 논의의 가능성이 다시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치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의제강간 연령 상향 같은, 좁은 차원의 해법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여성인 아동·청소년 역시 경제적 조건, 장애, 성적지향/성별정체성, 국적 등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아동·청소년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를 억압하는 힘들의 복잡성과 교차성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에서부터 바로 그 억압적 힘들을 해체하기 위한 실천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2. 성적권리 그리고 동의/행위 능력

 

성인 비장애인이라고 해서 언제나 성적으로 충족된 삶을 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섹슈얼리티나 성적권리가 부재한다거나 불충분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적인 것과 결부돼 어떤 종류의 실천이나 생각을 드러낸다 해도 성적권리와 섹슈얼리티가 없다고 여겨지거나 심지어 폭력이 정당화된다. 성적권리와 섹슈얼리티의 ‘자격’은 결국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또 그런 능력을 가진 ‘몸’이 어떤 몸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된다.3) 일정한 기준에서 표준적인 몸은 성적인 능력을 이미 언제나 갖춘 상태로 여겨진다. 페미니스트들은 표준적 남성 몸을 기준으로 한 성적권리의 차등과 섹슈얼리티의 부정의를 말해온 대표적 소수자 집단이다. 그러나 젠더만으로는 실제 다양하게 작동하는 배제를 설명하기에 너무나 협소하다. 표준적인 몸(의 능력)을 기준으로 한 성적권리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교차적으로 보면 훨씬 풍부한 논의가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권위주의 독재 정권 내내 우리나라 국가정책은 주로 ‘부랑아’ 혹은 ‘윤락녀’ 같은 범죄(가능성)와 관련해 소년/소녀를 소환했다. 가족해체나 가난으로 가부장의 부양 체계에서 벗어난 많은 소년/소녀들은 타락하고 위험한 섹슈얼리티를 담지한 존재로 표상됐던 것이다. 그와 같은 소년/소녀들은 ‘동의’를 요하지 않은 채 <형제복지원> 등으로 시설화 처분이 가능했던 주요 집단이었고,4) 따라서 우리나라 아동·청소년의 성적권리나 인권 논의는 오랜 시간 암흑기 상태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예로,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가 주도한 전 세계적 가족계획의 역사에서 장애인이나 소수인종 집단은 성적 권리가 부정되고 단종시술 같은 폭력을 경험한 대표적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뿐 아니라 ‘가난한’, ‘제3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성적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성 지식이나 사회적 인프라를 제공받기보다, 불임 시술을 비롯한 출산 통제 시술을 폭력적으로 강제당해야 했다. 성적권리와 동의 능력/행위성의 부정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장애인과 많은 여성들은 상당히 겹쳐지는 경험을 공유했던 것이다.

 

결국 성적권리란 어떤 배제도 없이,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하나의 핵심적인 요소다. 그런데 의제강간 연령상향 문제를 둘러싼 최근 논쟁에서 성적권리는 마치 성적인 행위를 할 권리만을 의미하는 것인 양 왜곡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성적권리는 성적인 행위를 둘러싼 주체성 및 행위성과 관련된,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며, 당연히 나이, 장애, 성별, 인종,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관계없이 모든 몸들에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특정한 상황에서 동의 능력/행위성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게 발휘되지 않을 수 있지만, 동의 능력/행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그리하여 그들의 동의 능력/행위성이 부정되지 않을 권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져야 한다.

 

아이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진 픽사베이
 

그렇다면 피해자 아동·청소년 개개인의 행위성/동의 여부를 묻지 않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겠다는 의제강간 규정의 위험성은 자명하다. 그것은 아동·청소년 개개인의 동의 능력/행위성을 부정함으로써 애초에 법이 의도한 개인의 성적권리보장이라는 법익을 침해하는 모순에 빠진다. 동의 및 동의 능력의 구성은 실제 연령뿐 아니라 복합적인 사회적 메커니즘을 살펴보아야만 하는 어려운 문제지만, 그렇다고(혹은 그렇기 때문에?) ‘나이’에 따라 동의 능력 여부를 아예 일률적으로 재단하겠다는 것은 누구를/무엇을 위하는 것인가. 그것은 수사사법 행정의 편의와 효율은 높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동·청소년을 진정으로 ‘보호’하고 나아가 동의 능력/행위성을 교육하고 지지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갈 가능성도 충분히 열어놓고 있다.

 

이와 연결해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은 장애인의 사례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성적 관계를 포함해 개인의 환경 속에서 동의 능력/행위성 여부를 둘러싼 가장 첨예한 논쟁이 제기된 대표적 집단은 장애인, 특히 지적장애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경우 의제강간 규정과 유사하게 동의 능력 여부를 묻지 않도록 성범죄 법률이 구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들이 성폭력에 가장 취약한 그리고 빈번한 대상이라는 진단 때문에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가해자들의 처벌 가능성을 높이고 취약한 잠재적 장애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문제설정은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의견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유지되어온 현행 성폭력특별법 제6조 ‘장애인에 대한 강간 및 강제추행’의 “신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에 있음” 조항5)은 장애인 성폭력 가해자의 기소 및 처벌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였을까? 장애인의 성적권리를 증진시켰을까? 답은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종종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드러났듯, 피해자가 “항거불능/항거곤란”한 주체라는 강력한 단서규정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법망을 빠져나간다. 더구나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성폭력 사건은 신고 자체가 어렵다(많은 지적장애 및 발달장애인들이 폐쇄적 시설에 살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꼭 폐쇄적 물리적 환경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들은 피해 신고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기에 피해를 당한다). 이 법은 어쩌면 피해자 쪽인 장애인에게 ‘장애=무능력과 취약성’이라는 강력한 상징성을 부여하는 데서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취약하고’ ‘무력한’ 장애인이기에 실제 현실에서 어떤 성관계/성폭력 상황에서든 선택이나 동의를 그들 스스로 말할 기회 혹은 질문받을 기회는 차단되고, 결과적으로 피해 상황에 더욱 취약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장애학자 Gill은 장애인의 성에 대한 전형적 인식(가장 취약한 성폭력 피해자)은 연민이며, ‘연민’의 대상이 될 때 ‘존중’과 ‘인권’의 가능성은 사라진다고 강조한다. 당연하게도 연민은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더 넓은 체계의 문제에 도전하지 않는다.

 

특정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무능력하고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위치지우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어도 해당 집단의 행위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폭력’과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 작동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무엇보다 ‘나’ 혹은 ‘우리’가 아닌 특정한 ‘그들’을 어떤 상태나 위치에 고정시키는 심각한 ‘타자화’를 감행하면서 그들의 인권과 성적 권리가 존중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보다, 성/폭력, 동의, 몸의 차이와 역량, 섹슈얼리티와 성적권리 등의 개념의 역사를 그들의 시각과 관점에서 다시 쓰고 재정립하기 위해 장애인, 아동·청소년, 성소수자, 여성 등 더 많은 ‘우리’가 교차적인 관점으로 상호 개입하고 논쟁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말해야 하지 않을까.

 

*                     *                     *

 

1) Mitchelle Murphy(2012), Seizing the means of reproduction.
2) Russell Christopher(2012), The paradox of statutory rape(Indiana Law Journal).
3) Michael Gill(2015), Already doing it: Intellectual disability and sexual agency.
4) <중앙일보>, “‘원장실 바닥엔 피범벅’ 형제복지원 끔찍했던 증언 나온다”, 2020.4.27. 최근 부산시가 주관해 이루어진 형제복지원 피해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4.5%인 가장 많은 수가 시설 수용 당시 15세 이하의 나이였다.
5) 이와 더불어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은 제8조 ‘장애인인 아동·청소년에 대한 간음’ 규정도 별도로 두고 있는데, 해당 조문은 장애인 아동·청소년의 나이를 13세 이상 19세 미만까지 포괄하는 한편, 의제강간과 마찬가지로 동의 여부나 행위 수단 등을 일체 묻지 않는다.

 

* 비마이너는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의 이슈페이퍼와 기사 제휴를 통해 이 글을 게재합니다. 셰어 홈페이지 http://srh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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