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09월25일fri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펼침
HOME 뉴스홈 > 기고ㆍ칼럼 > 칼럼 >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코로나 이후는 없다
[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등록일 [ 2020년09월01일 17시23분 ]

최근 광화문 집회로 인한 대규모 집단감염은 집에서 지척에 있는 장소에서 발생했고, 재난경보에 적힌 행정구역과 확진자의 동선은 내가 동네 바깥으로 나가는 모든 길을 막았다. 반년 만에 시작된 나의 소박하고 절박한 외출은 그렇게 끝났다.

 

코로나19 이야기로 글을 또 쓰고 싶지 않았다. 주제는 다 달랐지만, 3월, 4월, 5월 칼럼도 코로나19를 중심으로 하는 글들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온 사회의 관심사도, 내 일상도 코로나19에 묶여 있다. 나는 여전히 코로나19가 끝나길 바라면서 내 한 몸 건사하는 데에 바빴고, 백신 개발 소식에 기대를 안 걸면서도 백신 말고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모순을 당당히 외면하며 지냈다.

 

그래, 그건 모순이다. 백신에 기대를 걸 생각이 없다면, 백신 말고는 답이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코로나19 이야기로 글을 더 쓰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그 주제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의 삶을 삶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화를 내는 것도 지쳐서 대규모 집회 소식을 들어도 그저 헛웃음만 ‘허허’ 하고 나올 뿐이었다. 기저질환자인 나의 일상은 깊은 무기력을 빼고 설명할 수 없었다.

 

흑백 사진 속에서 한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하지만 그 이유는 바이러스만이 아니다. 이 수많은 사건이 나를 지치게 만든 데에는 하나의 인식 틀이 있었다. 이 사회가 코로나 ‘이전’으로 ‘회복’되길 바라는, 혹은 코로나 ‘이후’로 얼른 이행하길 바라는 사회적 담론과 집단적 열망이었다.

 

이는 두 층위에서 나타났다.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많이 줄어들자, 정부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완화하고 집합제한조치를 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외출하여 모여 놀고, 여행을 다녔다. 현재 확진자의 급격한 증가에는 단지 8.15 광화문 집회만이 아니라, 그전부터 차곡차곡 쌓인 지역사회 전파의 영향도 포함된다.

 

다른 한편,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한 직후, 아직 해결의 실마리조차 안 보일 때 우리 사회에는 ‘포스트 코로나’와 ‘뉴 노말’ 담론이 시작됐다. 이때 ‘포스트 코로나’와 ‘뉴 노말’은 분명 코로나 이전과는 다르지만, 대체로 ‘더욱 발전된 미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이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을 떠오르게 하는 비대면/원격 기술과 첨단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바이러스는 사라지고 다시 ‘건강해진’ 사회, 새로운 정상으로서 ‘새로운 경제’에 가깝다.

 

이처럼 코로나19 참사 속 사람들의 욕망은 과거나 미래만을 향했다. 장애인의 (비장애인이었던) 과거와 (치료되어 비장애인이 될) 미래만을 상상하는 치유 강제적 관점처럼, 건강중심주의는 사람들이 (질병 없이) 건강했던 대한민국과 (치료로 질병을 극복하여) 더욱 건강해진 대한민국만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그 안에 지금 아픈 사회의 모습은 없으며, 사회의 질병으로 은유되는 코로나19만이 이 땅의 유일한 문제로 지목되면서 코로나 이전 사회는 빠르게 낭만화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자주 사회를 몸이라는 하나의 유기체에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사회에 ‘병폐’가 생겼다거나, 사회가 ‘병들었다’라거나,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가 바이러스로 병들었다는 식의 말에는 언제나 사회를 ‘치료’해서 이전의 건강한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도대체 ‘건강’한 사회는 어떤 사회이고, ‘병든’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우리는 돌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 이전은 정말 우리의 추억만큼이나 아름다웠고, 코로나 이후는 그 이상으로 아름다울까?

 

사회를 몸이나 유기체로 보는 관점은 변화를 거부한다. 기존의 상태는 ‘건강’하다고 여겨지며, 제도 또한 ‘건강’을 기준으로 세워진다. 성소수자 혐오를 바탕으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대표적 단체 중 하나의 이름이 ‘건강한 사회를 위한 국민연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적 맥락에서 건강은 ‘건강관리’와 같은 용법을 넘어 그 자체로 ‘정상’을 의미한다.

 

‘건강’이라는 개념은 개인의 삶보다는 사회의 재생산과 유지·보수에 기여하는 개인의 쓸모에 집중하며, 개인의 적응과 복종을 요구한다. ‘건강하면 당연히 좋다’라는 건강중심주의처럼, 이미 존재하는 기준에 대한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건강’이라는 말을 빼앗아서 차별에 반대하는 수사로 사용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질병 은유가 질병의 현실을 가린다는 이유에서 그 은유에 반대해 왔다. 마찬가지로 사회를 몸으로 은유하는 것에도 반대해 왔다. 이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가 경험하는 ‘병’을 치료되지 않는 병으로 바꾼다면 어떨까? 이는 사회를 기본적으로 건강한 몸이 아닌 필연적으로 아프거나 아플지도 모르는 몸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끝없이 등장하는 질병 은유에 질리는 대신, 나는 그걸 뒤집어 보고 싶어졌다. 기존의 질병 은유에서 위기나 위험은 항상 치료하고 넘어갈 수 있는 급성 질환이었다. 하지만 사회의 위기나 위험은 그렇게 대증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잠깐 발생하는 증상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성 원리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즉, 만약 사회의 위기나 위험이 꼭 질병으로 불려야 한다면, 그것은 급성 질환이 아닌 만성질환이어야 한다.

 

사회의 ‘병폐’를 만성질환으로 전환한다면, 사회는 낫지 않는 질병을 경험하는 존재가 된다. 건강한 몸이 아닌 아픈 몸이 된다. 이때 사회에 대한 몸이나 질병의 은유는 비로소 현실에 가까워질 가능성을 얻는다. 위기는 그저 한 번 넘기거나 극복해서 ‘치료’할 수 없고, 끊임없이 나를 찾아오고 위협한다. 방역과 같은 완화 조치에 성공하면 사회는 위기, 즉 증상이 없는 상태인 관해기에 접어들고, 이제 목표는 관리로 바뀐다.

 

관리의 핵심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삶이다. 치료제가 나오지 않을 상황을 전제하고 지금의 일상을 잘 살아내고자 노력해야만 희생을 줄일 수 있다. 삶을 개선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아니 ‘코로나’는 끝나지 않는다. 설령 끝난 듯해도, 어느 정도는 끝나지 않은 듯 살아야 한다. 바이러스와 질병이 치료·제거되어 건강해진 코로나 ‘이후’도, 지금보다는 당연히 나았던 코로나 ‘과거’도 없다. 다만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고 새로운 일상 속에서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코로나라는 ‘현재’가 있을 뿐이다.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을 썼다.

올려 3 내려 0
안희제 dheejeh@nave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설령 그 기억이 정말 틀렸더라도
집에서의 5개월 : 어느 아픈 대학생의 칩거 수기
코로나19, ‘기저질환자의 죽음’이 은폐하는 현실
바이러스는 어떻게 질병이 되는가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프린트하기
  •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댓글, 욕설과 혐오를 담은 댓글, 광고 등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삭제될 수 있으니 댓글 작성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피, 똥, 눈물 (2020-08-04 15:2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