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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박기자와 좌충우돌 장애학 톺아보기6] 너와 나를 넘어선 장애인운동 가능하려면?
손상의 개별성을 넘어 장애대중의 요구를 담은 사회적 장애이론
타자화된 장애인, 장애인 스스로 외부화시켜야
등록일 [ 2011년03월21일 02시40분 ]

지난 회에 우리는 사회적 장애이론이 다른 이론들에서 받는 비판과 쟁점 사항을 살펴봤다. 페미니즘, ‘몸의 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회적 장애이론이 장애인 개개인의 특별한 체험일 수 있는 ‘손상’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해 사회적 장애이론에 제기되는 또 하나의 쟁점이 ‘공통성과 차이’의 문제이다. 장애인으로 범주화돼도 그 집단 내의 개인들은 젠더·섹슈얼리티·인종·계급·손상 유형에 따라 다양한 차이들을 지니고 있다. 일상의 경험과 억압 형태, 정도 역시 다양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장애인 내부의 경험 차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크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적 장애모형은 ‘공통적 경험과 실재’를 강조하면서 개별적 경험의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페미니즘 등 기타 이론들은 사회적 장애이론이 '개인적 특수성'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사회적 장애이론은 개인을 넘어선 보편적 문제에서 함께 싸워야 함을 강조한 것이지 개인의 특수성을 무시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사진은 2011년 광화문역의 상황. 도심 한복판의 대표적 전철역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리프트로 이동해야 한다. 관계자에게 그 이유를 묻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공간이 없다'고 답했다.

 

일례로 페미니즘이론에서 보자면, 장애여성은 장애로 받는 억압과 여성으로 받는 억압이 동시에 발생한다. 결국 장애여성은 장애인이라는 집단의 하위범주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자성을 지닌 집단이라는 것이다.

 

장애인 내부의 차이를 강조하는 또 다른 흐름은 탈근대주의자들로부터 제기된다. 탈근대주의 이론가들은 사회적 장애이론에 근거한 장애인운동이 경제적 성취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근대사회의 산물인 장애라는 범주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장애라는 범주의 발명이 기본적으로 ‘분할과 통제’라는 근대사회 지배전략의 하나인데, 장애인의 집단적 정체성과 공통성에 기초한 투쟁전략은 지배전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사회적 장애이론가들은 그렇게 개인의 다중적이고 동시적 경험을 분리하려 든다면 대중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답한다. 또한 사회적 장애이론은 이런 장애인 내부의 차이를 무시하고 덮어두자는 것이 아니며, 개인이 처한 구체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공통성의 경험과 이에 대한 확인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비장애여성과 장애남성에게서도 공통성이 존재할 수 있다. 빈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보편적인 소득보장정책의 관철이 필요한 경우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즉, 개인 간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장애라는 집단적 정체성을 인정하고 이에 기초해 투쟁하는 것은 서로 대립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 보편성의 정치로

 

지금까지 우리는 대략적으로나마 장애학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장애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손상과 장애를 분리해 ‘장애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는 사회적 장애이론을 살펴봤다.

 

사회적 장애이론의 기본방향은 장애인운동이고 이 운동은 다른 많은 소수자운동과 마찬가지로 ‘정체성의 정치’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가 지닐 수 있는 한계 중 하나는 보편성의 결여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당면한 목표이며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되는 것이다.

 

이에 맞서 장애인차별은 ‘사회구성원 일반에 비해 미달하는 어떤 무엇’으로 정의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보편적인 사회구성원들의 권리 수준은 장애인의 권리수준을 가늠하고 제약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언제나 남아 있다.

 

▲장애인운동은 다른 진보 운동과 연대하면서 보편성을 획득해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420장애인차별철폐 집회 모습.

 

운동 전체가 전진하고 사회구성원 일반의 권리가 확장되는 국면에서는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가 지닌 한계가 잘 드러나지 않고 문제도 되지 않는다. 자신의 권리를 위해 전투적으로 열심히 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사회구성원 전체의 권리가 제약당하거나 후퇴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권리만을 위해 싸우는 것은 불충분하다. 자신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사회구성원 일반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이중적 차원의 전투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우리만의 권리’라도 지켜내려는 경향, 소위 조합주의적 ‘실리주의’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분할과 통제 전략 아래에서 이러한 실리주의는 너무나 쉽게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보편성의 정치가 언제나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사회적 장애이론에 바탕을 둔 장애인운동이 좌파적 정당정치와 연대하는 것은 보편성의 정치에 대한 긴장감을 유지해 가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너와 나를 넘어선 장애인운동은 가능할까?

 

무자르듯이 선명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학 함께 읽기’의 저자 김도현 활동가는 한국사회의 장애인 운동의 시기가 구분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2000년 이후 한국 사회의 장애인운동은 여타의 사회운동과 다른 궤적을 그려왔다고 밝혔다. 

 

2001년부터 지하철 선로와 버스와 도로를 ‘막무가내’로 점거했던 장애인이동권 투쟁은 2005년에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을 만들어냈다. 이동권 투쟁에 이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장애인 대중의 다양한 권리 요구들은 2007년에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과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정, 활동보조서비스의 전국적 시행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김 활동가는 이러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틈새를 뚫고 나온 장애인 대중의 힘으로 가능했다고 본다. 전 국토가 반나절 생활권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시대에 1·2급 중증장애인의 절반이 한 달에 세 번도 외출하지 못하고, 대학진학률 80% 시대에 장애인의 49%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으로 살아가며, 전체장애인의 60% 이상이 실질적인 실업상태에 놓여 불인정 노동을 강요받는 이 상황을 장애대중이 사회에 알렸고, 그나마 알량한 절차적 민주주의 사회가 더는 ‘안돼’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거세질 신자유주의 물결에 맞서 중요한 것은 ‘연대’라고 강조한다.

 

이 시점에서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장애인계에 이제 겨우 이 년여 남짓 있었던 것에 불과한 본 기자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에 장애인 문제를 알려가는 것에 대해 더욱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진보 언론이라고 하는 한겨레나 경향 등의 신문에서도 ‘장애 극복’에 초점을 맞춘 성공담을 내보내고 있다. 얼마 전 한 출판사에서 나온 책 ‘나는 멋지고 아름답다’는 ‘장애를 이겨낸 24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방송에서도 미국의 한 장애청소년이 활발하게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감동이야기를 보여주지만, 그 장애청소년이 학교에 잘 다닐 수 있게 한 미국의 턱없는 도로와 장애아와 비장애아가 학교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게 된 통합교육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소개가 없다. 여전히 장애를 사회적 구조의 억압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문제로만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작년에 장애인계는 매주 광화문 광장에서 '장애인 활동보조 살리기 신문고를 울려라' 행사를 진행하면서 장애인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려 시도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바 있다.
이러한 시각은 같은 운동권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삼성불매를 외치는 사람들은 거대기업의 횡포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며, “삼성물건 사는 사람은 정신병자”라는 식으로 ‘정신장애인’을 비하하는 용어를 사용한다. 또한 ‘병신’이라는 용어도 장애인을 비하하는 발언임에도 욕설로 자주 쓰인다. 작년 노동절 때는 민주노총 위원장이 '이명박 정권은 반신불수'라고 발언해 장애인계가 항의하기도 했다.

 

동성애, 이주노동자, 빈민 운동 등 사회적 약자 운동이 모두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기자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장애인운동은 그중에서도 우리 사회에서 타자화된 운동의 대표격이라 생각한다. 장애인시설의 부정과 비리가 터져 나왔을 때, 다들 그 반인권성에 혀를 차면서도 장애인을 위해 더 인권이 보장된 시설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지, 장애인이 지역사회에 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한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에 미인가 신고 시설에 갔을 때도 그런 경험을 했다. 인천에 있는 그 시설은 썩은 음식을 장애인에게 주거나, 학대하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장애인 시설의 문제점이라 생각하면 흔히 텔레비전에서 보듯 장애인 학대를 생각하던 기자에게 그 시설은 취재하기엔 약간 밋밋하기까지 한 곳이었다.

 

그런데 시설을 돌아보니 인권침해가 구석구석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일단 건물 3층에 있는 그 시설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러니 장애인 스스로 혼자 이동할 수가 없었다. 생활인들은 일 년에 한두 번 있는 소풍 날 자원봉사자의 등에 업혀 외출하는 게 고작이었다. 건물 근처에 슈퍼마켓이 다섯 군데가 넘게 있었는데도 거실 마루 장식장에 진열된 과자만을 하루 용돈 3천 원 중에서 일부를 털어 사 먹어야 했다. 창문에는 모두 촘촘하게 방범창이 설치돼 밖을 잘 내다보지 못했다. 이는 물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범창이 아니었다. 3층 건물에 방범창을 설치한 목적은 내부에서 외부를 보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였다. 가족이 면회와도 꼭 시설종사자와 같이 외출을 해야 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매주 외부에서 자원봉사자가 와서 시설일을 도우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기자 또한 만약 장애인계에서 기자 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보기에 깨끗하고 제때 식사를 주는 그 시설이 ‘인권침해 현장’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증장애인은 시설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 나와 살기 위해서는 활동보조시간이 추가로 지원돼야 한다’는 구호를 비장애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기자가 되기 전 ‘활동보조인제도’라는 말을 들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듯이.

 

그렇다면 너와 나를 넘어선 장애인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비장애인과 함께하는 운동이 되어야 하고, 장애인문제를 계속 알려야 한다. 장애인계가 정부나 지자체와 싸워나가는 과정과 다른 소수자운동과 연대하는 과정 또한 분명히 필요하나 이에 못지않게 이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 장애인계에서만 공유하는 문제의식을 널리 알려야 한다.

 

얼마 전 텔레비전의 한 드라마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뤄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낳았는데 덕분에 동성애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우리 어머니 같은 세대도 동성애자의 아픔을 이해하게 됐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해 방송이 접근하는 태도는 주로 '장애 극복’ 같은 성공담이나 ‘장애인의 비참한 생활상’ 같은 동정유발 프로그램이다. 왜 탈시설이 필요한지와 지역사회에서 독립해 사는 장애인들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장애인들이 일단 시설에서 많이 나와야겠고, 거리를 지금보다 훨씬 많이 활보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나 기업이 도로의 접근성을 더 고려하게 될 테고, 장애인계 내부에서도 손을 놓고 있는 장애인노동권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 빈민들이 꼭 노동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먹고살 수 있게 삶을 보장해주는 제도마련이 최종점이 되길 희망한다.

 

작년 3월 초에 시작된 ‘초보 박기자와 좌충우돌 장애학 톺아보기’를 일 년여 만에 끝맺는다. 원래 계획은 한 달에 두 번 쓸 예정이었으나 일정에 쫓겨 제대로 글을 쓰지 못했다. 더구나 장애인계 현황에 대해 더 다양한 논의들을 써보고 싶었는데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기자는 그야말로 좌충우돌만 하다 연재를 마감하게 됐다.

 

그러나 기자가 애초 장애학 연재를 시작할 때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으면서도 선뜻 연재를 맡겠다고 한 것은 ‘좌충우돌하면서 성장하기’라는 의도가 있었다. 글이란 독자를 의식해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개인적인 의식의 성장을 목적에 뒀고 소기의 목적을 나름대로 달성했다고 본다.

 

▲'장애학'을 연재하면서 스스로 기자가 인식의 전환을 이뤘듯이 독자 여러분도 장애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는 눈을 키우셨길 희망한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장애인 문제에 대해 사회에 문제 제기를 해주시길 바란다.

 

얼마 전에 어느 대학에서 장애대학생을 둔 한 어머니에게 ‘장한 어머니상’을 줬다는 기사를 봤다. 지체장애 2급인 아들을 4년 동안 업고 등하교해 학교 측에서 상을 줬다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적이라고 인터넷에 댓글을 많이 달았다. 예전 같았으면 기자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장애학을 공부하고 나니 편의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 대학이 정말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한 어머니상’으로 장애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항상 치환해버리는 이 사회가 정말 문제구나 싶었다. 그래서 인터넷에 그 의견을 올렸으나 미담에 재 뿌리는 글로 핀잔을 들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 제기를 멈추지 않을 때 이 사회가 조금씩 바뀌리라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 장애학 연재였지만, 독자 여러분에게 이 글이 기존의 장애를 바라보는 시점에 조금이나마 변화를 주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조금 더 장애인 문제에 대해 이 사회에 떠들어주길 기대한다. 여러분이 하는 작은 말과 행동 한 마디가 모두 정치적 효과를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모두 활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그동안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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