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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초 구치소 이야기②
등록일 [ 2012년11월18일 02시46분 ]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박정혁 활동가 모습.
저녁 식사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손 있는 사람’은 먹는 둥 마는 둥 졸지에 손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나와 몇몇 사람들, 식어가는 음식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모두 열 받아서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검찰청 집행 2과 사무실이다. 우리가 사무실로 쳐들어가자 검찰청 직원들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자와 비장애인 활동가들 참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가볍게 욕설이 오갔고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다. 1시간이 흘렀고 지루한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체력의 한계를 보이는 동료가 생겼다. 은평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의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낮에 뜨거운 햇볕 아래서 시달린 탓에 체력이 바닥나고 있었다. 급히 누울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검찰청 직원들에게 이분 빨리 눕혀야 한다고 하자 허둥지둥 지하 1층 당직실로 안내해 준다. 이젠 열까지 펄펄 난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119를 불렀다. 구급차는 10분 만에 도착했고 은평센터 소장은 결국 구치소 대신 병원으로 실려 가야 했다. 긴 시간이 흘러 밤 9시가 넘어서자 우리를 실어 구치소까지 태우고 갈 호송버스가 오고 있다고 직원이 말해줬다. 9시 반이 넘자 검찰청 직원이 우리를 주차장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나가보니 과연 버스가 도착해 있었다. 서울시경이 보유한 저상버스 호송차다.

 

버스의 발판이 내려오고 한 사람씩 차례차례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3대가 도착했고 1호차에는 3명, 2호차, 3호차에는 각각 2명씩 탔다. 버스 안은 의자를 다 떼서 최대 4대까지는 탈 수 있을 정도로 넓어 보였다. 나는 3호차에 탔고 부산에서 센터장 하는 친구와 같이 탔다. 버스는 차례차례 서울구치소를 향해 출발했다.

 

구치소 생활의 시작

 

약 30~40분 걸려서 서울구치소에 도착했다. 한밤중이라 모두가 자는 듯 고요했고 무더운 날씨임에도 왠지 모를 한기가 엄습했다. 아무래도 구치소라는 선입견 때문인 것 같다. 버스에서 내리자 한기는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여성 동지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여성숙소로 먼저 옮겨진 것 같다. 차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검은 제복의 건장한 남자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입구에 쇠로 만든 철장이 열리고 그 안으로 전동휠체어 4대가 일렬로 빨려들었다. 건물 안은 습도가 매우 높고 무더웠다. 긴장감 때문인지 땀이 나기 시작했다. 검은 제복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무슨 검사실 같았다. 그곳에는 교도관들과 의사가 보였다. 우리는 순서대로 신체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신상조회부터 시작해 어떻게 장애인이 됐는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꼬치꼬치 물었다. 피를 뽑고 혈압체크에 당뇨검사까지 공짜로 건강검진을 받은 셈이다. 밖에서 입던 옷은 팬티까지 다 벗겼고 하늘색의 러닝셔츠와 파란색 수의가 각자 주어졌다. 저녁을 못 먹어서 배고프다고 하니 밥을 줬다. 근데 콩밥은 아니었다. 검찰청에서와는 달리 밥도 잘 먹여줬다.

 

모든 검사절차가 끝나고 우리는 각자 다른 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내 구치소 수인 번호는 ‘8하동 857’ 언제 바깥세상 공기를 마실지 모르지만 이곳에선 이 번호가 내 이름 역할을 한다. 문뜩 예전에 tv에서 봤던 광복절 특집극 ‘절정’이 떠올랐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분의 본명은 따로 있고 자신의 수인번호 264를 필명으로 쓴다. 그럼 나도 이 수인번호를 필명으로 써볼까? ‘팔 하동 팔오칠’? 너무 길다.

 

어쨌든 검사가 끝나고 교도관들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구치소 바닥면은 휠체어가 다니기 편하게 만들어졌다. 철창문 두 개를 통과하고 도착한 곳은 8하동(8下동) 8xx호 감방, 교도관이 문을 두드리고 열쇠를 꺼내 문을 딴다. 철문 특유의 기분 나쁜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안에서는 잠이 덜 깬 듯한 나이 드신 어른이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교도관이 말한다.

 

“이 분 장애가 심한데 당분간 이 방에서 지낼 겁니다. 잘 좀 보살펴 주십시오.”

 

교도관은 방 안의 사람들과 함께 날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게딱지만큼 좁은 방에 다섯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중 가장 젊은 남자가 내가 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니 어쩌다가 이런 몸에 이런 곳으로…”

 

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런 사람을 이런 곳에 집어넣으면 어떡해! 저 사람은 병실동에 가야 한다고!”

 

난 차분한 어조로 이러이러한 사정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설명해 줬고 폐를 끼치게 돼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본의 아니게 이분들이 내 수발을 들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을 듣고는 젊은 친구가 화를 낸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사람을 이렇게 어려운 곳에 집어넣을 수 있지? 도저히 이해 안 되네?”

 

그러자 다른 수감자들도 흥분한다. 나이 많으신 분이 이들을 달래며 말한다.

 

“자 자 흥분 가라앉히고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푹 자고 내일 날 밝으면 얘기합시다.”

 

노인은 이어서 나에게 말한다.

 

“젊은이 잠은 잘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눈을 좀 붙여봐. 그리고 필요한 일 있으면 날 깨워!”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모두 자리에 누웠고 나도 잠시 앉아 있다가 누웠지만 잠이 안 왔다. 5평 남짓한 작은 방에 20인치쯤 돼 보이는 TV가 방 한구석 벽에 붙여져 있었고 천장 한쪽 면에는 선풍기가 자동으로 켜졌다 꺼졌다 반복했다. 이렇게 긴 하루가 저물었다.

 

다음 날 아침 6시, 사람들이 일어나 이불을 개기 시작했다. 난 느지막이 잠들었던 터라 겨우 눈 뜨고 좁은 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어떤 사람은 요와 이불을 개고 어떤 사람은 방을 쓸고 닦고, 또 어떤 사람은 아침 먹을 준비를 했다. 가만 보니 모두 성치 않은 몸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편마비가 있어 보였고 어떤 사람은 다리가 불편했고 어떤 사람은 허리디스크가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정신장애가 있어 보였다. 알고 보니 이곳은 장애인 방이었다.

 

아침 배식은 7시 반쯤 나왔다. 가로로 쳐진 철창으로 막힌 창문이 커다랗게 있었고 그 밑으로 가로세로 20cm도 안 돼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배식시간이 되면 그곳으로 밥과 국이 들어왔다. 한수라는 형님이 내 밥을 먹여주셨는데 이곳에서 이틀 있는 동안 그분이 나의 신변처리를 도맡아 주셨다. 이 형님은 방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일들과 힘쓰는 일 등을 도맡았고 진용이라는 젊은 친구는 이방에서 꽤 리더십이 있어 보였다. 교도관과 물품목록 작성 등 사무적인 일들을 담당했다. 성철이 형님은 방바닥을 닦으셨고 제일 어르신이신 진수 형님은 설거지를 도맡아 하셨다.

 

하루에 두 번씩 뜨거운 물이 들어오는데 그 물로 커피를 타 마신다. 그리고 하루 세 번 TV가 자동으로 들어왔다가 나간다. 채널은 돌릴 수 없고 교도소에서 사전 검열한 방송만 보여준다. 실시간 방송은 절대 못 본다. 문 앞에는 턱이 있어서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했고 화장실은 좁아도 너무 좁았다. 필요한 물건을 사려면 구매목록을 적어야 하고 교도소 내에서 판매하는 것만 살 수 있다. 하루 두 번 운동 시간도 있는데 이 시간에 바깥바람 쐬고 싶은 사람들은 교도관에게 미리 말해야 한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감방 복도에서 밥 차를 나르거나 우편물을 배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모범수 중에서 선발한다고 한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올 때 옷을 날랐던 사람들도 이 사람들이다.

 

이곳 서울구치소는 재판 중이거나 약식기소 되어 우리처럼 벌금 대신 몸으로 때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재판에서 확정 판결을 받으면 다른 교도소로 옮겨진다. 우리 방 사람들도 대부분 확정 판결을 받아 조만간 다른 교도소로 이감된다고 한다. ㅇㅇ씨 같은 경우는 금융회사에서 근무하다 상관들의 횡령을 자신이 뒤집어썼다고 주장했다. 무심결에 사인한 것이 증거가 되어 대법원까지 가서 확정판결을 받아 3년형을 받았지만 출소하면 꼭 재심을 청구해 누명을 벗고 싶다고 했다.

 

이날 하루는 사실 불안불안 했지만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이곳에서 영원히 갇히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지만 믿는 구석은 있었다. 벌금 60만 원이 있어서 원칙대로라면 12일을 지내야 하지만 우리는 다음날 오후 무사히 서울구치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구치소에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종교단체가 우리 사정을 듣고 나머지 벌금을 모두 대납해 줬기 때문이다.

 

서울구치소 경험은 어쨌든 매우 흥미로웠다. 장애인생활시설을 난 가끔 교도소로 비유하고는 했지만 실제 구치소 생활을 해보니 구치소가 아주 조금 더 나아 보였다. 그곳에선 적어도 밥을 자기 맘대로 뒤섞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다시 구치소 가볼래? 라고 권한다면 난 그 사람에게 딱 한마디만 할 것이다.

 

“너나 가라~ 구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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