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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제 이별할지 몰라도
서로 서로 걱정해주고 관심 기울이는 새해를…
등록일 [ 2013년12월19일 23시59분 ]

2013년은 이별이 많았던 한해였습니다. 알다시피 지난봄,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저에겐 너무나 아픈 이별이었죠. 10년 전, 살을 에는 추위로 유명한 철원의 장애인생활시설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자립생활 하겠다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지금의 아내와 잠시 이별을 고했던 그때, 그때의 이별은 말 그대로 잠시 이별이었습니다. 그때의 이별은 희망이 있었고, 1년 뒤, 전 그녀와 자립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집도 마땅치 않았고, 우리 둘 다 중증의 장애가 있기에 더 꼭 필요했던 활동보조서비스조차 없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자립생활센터에서 시범사업조로 파견된 활동보조시간 하루 두세 시간 정도를 제외하고는, 집 근처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활동보조를 구걸했었지만, 둘이 함께 한 지붕 아래 한 침대에서 뒹굴 수 있었기에, 부부의 연을 맺은 우리는 당시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었어도 참 행복했습니다. 물론 그런 행복 속에는 갈등도 있었고 서로에게 화나는 것들, 그리고 헤어짐의 위기 또한 있었습니다. 그런대로 10년의 부부생활을 잘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아내였던 지영 씨는 매우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생활력과 행동력을 접했던 사람들 대부분 그녀의 절친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녀를 존경했습니다. 내게도 그녀는 아내이기 이전에 인생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이젠 숨 쉴 만큼 거주지도 안정되었는데, 살만큼 활동보조서비스도 충분히 늘었는데, 그런 혜택을 누리기도 전에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게 아쉬움이 크게 남습니다.

 

며칠 전, 그녀가 모셔진 벽제 화장터에 다녀왔습니다. 난 그녀에게 행복했었냐고 물었습니다. 여전히 그녀는 말이 없더군요. 그녀가 시설을 나오기 전에 센터 소장과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게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이별이 많았던 2013년, 내 아내 외에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이별로 나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여름에는 함께 정당 활동을 했었고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함께 선거운동을 했던 젊은 청년 당원의 갑작스런 죽음이 나를 또다시 힘들게 했습니다. 참 열심히 활동했던 젊은 친구였습니다. 비록 정당 활동에 손 떼고 있었던 나였지만, 그의 활발한 활동은 늘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엔가 장애인문화공간 사무실에서 일할 때 그가 빔프로젝터를 빌리러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가 날 보고 웃으며 언제 한번 밥 같이 먹자고 했었는데 그때의 모습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지병이 있어서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돌연사라고 합니다. 그의 빈소에는 그의 젊은 아내와 어린 딸의 슬픈 눈물이 서려 있었습니다. 아내의 죽음과는 또 다른 아련함이 밀려들더군요. 고인의 아내는 내게 말했습니다. 이별에 익숙해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나 또한 아직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익숙하지 않은 죽음의 소식이 다가왔습니다. 준혁의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내게 안타깝고 안타깝고 눈물조차 안 나오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도와줬던 활동보조인이었기에 그의 비보는 나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강도였습니다.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번졌고 병원에서 수술받다가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더욱 기막힌 일은 직계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친척들이 장례절차도 없이 화장해 그의 뼛가루가 흔적 없이 바람에 뿌려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너무나 허망한 죽음입니다. 난 그에게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그가 배가 아프다고 했을 때 건성으로 병원 가라고 했고 그가 활동보조 하러 집에 왔을 때 병원 갔다 왔느냐고만 물었지 그가 진짜로 병원에 다녀왔는지는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는 지적장애가 있었습니다. 비록 3급이지만 겁이 많아 병원이 무서웠을 것이란 생각을 왜 우리는 못했을까요? 그는 우리가 전화하면 거절도 못 하고 달려왔는데, 나는 내 필요에 의한 전화 외에 그의 안부를 묻는 전화 연락을 왜 못 했을까요? 왜 준혁이는 우리에게 아프다고, 도와달라고 손 내밀지 못 했을까요?

 

아내가 떠난 후, 난 모든 일이 귀찮아졌습니다. 그래서 다니던 장애인문화공간 활동도 접었고 방송대 학기도 휴학했었습니다. 인터넷 신문의 칼럼도 중단했습니다. 마음이 힘들었기에 절필을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시설을 나와서 10년 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리고 즐겁고 재밌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열심히 살지도 못했고 즐겁고 재밌게 살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2013년도 열흘도 채 안 남았습니다. 생명은 누구나 어떤 것이든 죽습니다. 위의 세분 외에도 내가 알던 모르던 많은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그들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슬펐던 한해였지만 깨달음도 많았던 한해였습니다.

 

먼저 가신 우동민 열사가 생전 인권위 농성 때 했던 말 “옆 사람 좀 보자고!” 모두 기억하시죠? 우리 언제 이별할지는 몰라도 서로가 서로를 걱정해주고 관심 기울이는 그런 관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가오는 2014년에는 적막한 골방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제2의 준혁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친구가 되어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음 놓고 걱정거리를 털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의 그 순간까지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또한 행복한 죽음을 맞기 위해 열심히 서로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열심히 살 것이고 글도 열심히 쓸 겁니다. 불의에 분노해서 싸우기도 하겠지만, 싸우다 지쳐 절망하는 동지들도 지키겠습니다. 그들이 다시 희망을 회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지치고 희망 잃은 옆의 동지들의 손을 잡고 함께 가는 2014년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정혁의 달팽이의 기어달리기

달팽이는 매우 느린 동물 중 하나다. 그런 달팽이가 어디론가 기어가는 중이다. 자기 자신은 있는 힘껏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빠르다고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달팽이는 너무 느리다. 너무나 느려서 가고 있기나 하는지 모르겠다고 다른 이들이 푸념을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돌아간다. 그의 걸음걸이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묵묵히 기어 달린다. 꽃이 피면 꽃향기 맡으며, 바람이 불면 바람과 대화하며, 비가 내리면 비와 함께 묵묵하게 한 방향으로만 기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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