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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지 못했던 말
아름답고 완벽한 언어, 수화
등록일 [ 2015년09월23일 00시28분 ]

눈과 귀중 하나를 포기하라면


만약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청각과 시각중 하나를 잃어야 한다면, 어느 쪽을 포기하는 것이 삶에 덜 손실일까? 가끔 나의 (눈치 없는) 지인들은 말한다. “시각장애가 제일 힘들 것 같아. 너는 걷지 못해도 눈이 보이니 얼마나 좋냐!” 어떤 장애가 더 힘들까 겨루는 일은 사실 터무니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각을 잃어버릴 때 가장 큰 어려움을 겪으리라 생각하는 듯 하다(시각장애인들의 생각은 아마 전혀 다를 것이다).


청각장애인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는데 어려움이 없으므로, 인류의 오랜 역사 동안 중요했던 과업, 즉 사냥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일, 전투에 나가 싸우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반면 이런 일들이 어려운 시각장애인들은 훨씬 더 소외되지 않았을까? 우리 직관과는 달리 역사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은 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경우들이 적지 않았으며 조선시대에도 시각장애인이 궁궐의 악사나 점을 치는 점복으로 꽤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는 증거도 많다.


반면 역사적으로 가장 철저하게 소외된 장애인은 (특히 선천적인) 청각장애인들이었다. 이들은 지능지수가 낮다고 여겨졌고, 실제로 지적인 능력이 상당 부분 성장하지 못했다. 농아인, 즉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거의 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이런 인식의 흔적 중 하나는 우리나라 형법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형법 제11조는 “농아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한다”라고 규정한다(시각장애나 지체장애 그 자체만을 이유로 형을 감경한다는 조문 따위는 없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의사결정능력이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미성년자와 동일하게 대우하라는 것이다. 결국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시기에서 눈과 귀를 포기하는 어려운 선택에 놓여야 한다면, 눈을 포기하는 편이 덜 험난한 삶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수화로 '사랑합니다' (출처: www.flickr.com)


외로운 언어


노동이나 전투도 가능했을 청각장애인들은 왜 그토록 소외되었던 것일까? 바로 ‘말’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 즉 언어 없이도 사람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여부는 늘 학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냈지만(당신은 ‘개념’이라는 말이 없이 도대체 개념이 무엇인지 개념이나 잡을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말이 없이 고도로 복잡한 지성을 발전시키고 지식을 쌓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청각장애인들이 상당수 모여 살던 곳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이들은 자신들끼리 사용하는 언어, 즉 수화를 발전시켰다. 수화를 배운 청각장애인들은 생각을 발전시키고 최소한의 지식을 서로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화는 소리로 의사소통하는 사람들에게 는 말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고, 수화와 소리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화는 소수의 청각장애인들만이 사용하는 외로운 말이었다.
 

올리버 색스와 드 레페


18세기까지 비참했던 청각장애인들의 삶은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프랑스의 신부였던 드 레페는 어느 날 청각장애인들이 여러 명 모여 주고받는 몸짓이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나름의 언어라고 생각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말을 할 수 없고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인간은 무엇도 배울 수 없다고 여겼지만, 드 레페는 청각장애인들의 몸짓을 이해하면 그들을 교육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하며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청각장애인들의 ‘언어’를 배운 뒤, 그가 그동안 배워왔던 ‘소리와 문자로 된 말(즉 프랑스어)’을 수화의 각 표현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로 쓰인 ‘물’이라는 단어를 수화표현으로 물과 대응시켜 알려주는 식이었다.


드 레페의 교육방법은 어찌나 효과적이었던지, 교육받은 청각장애인들은 곧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고, 그간 대부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류가 축적한 지식, 정보, 복잡한 개념체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드 레페는 이 방법을 통해 학생들에게 세상의 지식과 문화로 통하는 문을 단숨에 열어준 셈이었다.


청각장애인들이 소리와 문자로 된 언어를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을 알리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모여 사용하는 수화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알려진 수화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고 고유한 문법체계를 갖춘 언어였다. 선천적 청각장애인들도 인공 와우 수술을 받고 구화를 배우는 일 따위를 하지 못하더라도, 어린 시절 수화를 제1의 언어로 배우면 소리언어를 배우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복잡한 뇌신경망을 구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드 레페가 수화와 문자를 연결해 청각장애인들을 이 세계에 등장시켰다면, 수화라는 언어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린 사람은 바로 얼마 전 타계한 신경과 전문의 올리버 색스(Oliver Sacks)였다. 그는 생전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보이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밝혀내는 일을 즐거워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책 <목소리를 보았네>(알마, 2012)는 말할 수 없다고 여겨진 사람들이 얼마나 우아하고 정교한 말을 해왔는지를 밝히는 놀라운 책이다.


드 레페 신부와 올리버 색스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청각장애와 시각장애 중 무엇이 더 어려운 장애인가와 같은 질문이 왜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다. 무엇이 더 ‘심각한 장애’인지 여부는 각 감각이 가진 생물학적 기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수화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의사소통방식을 지지하는 사회라면, 청각장애인이 되는 일도 결코 비극이 아니라 특별한 삶의 하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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