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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를 다시 보며, “공주는 말할 수 있는가?”
신기루를 헤매는 장애여성의 ‘말’과 ‘사랑’에 대하여
등록일 [ 2016년02월01일 15시01분 ]

2002년에 나온 영화 「오아시스」(이창동 감독)는 당시 한국 영화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영화는 흥행했으며, 2002년 제59회 베니스 영화제에 장편 경쟁부분에 초청되어 감독상, 신인연기상, 국제비평가협회상, 가톨릭언론협회상, 청년비평가상 등을 영예로운 수상기록을 남겼다.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 특히 뇌성마비 장애여성인 ‘공주’ 역을 맡은 문소리의 연기는 작품의 완성도를 한껏 높였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다. 또한 「오아시스」는 한국 사회의 수면 아래에 잠식되어 있던 장애인의 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올 수 있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영화 곳곳에서는 사뭇 이해되지 않는 지점들이 발견됐고 이는 불편한 감정을 자아냈다.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은 이 시점에서 다시 영화를 살펴보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고자 한다.

영화 「오아시스」포스터


범박하게 「오아시스」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비장애인 남성과 장애인 여성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자동차 뺑소니로 징역을 살았던 종두(설경구 분)는 출소 다다음날 피해자 가족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은 그를 냉대했으며 더욱이 종두가 찾아가려고 한 날이 이사 가는 날이라 종두를 서둘러 내쫓는다. 그 과정에서 종두는 홀로 집에 남겨진 공주(문소리 분)를 발견했는데 장애를 가진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연락처를 건넨다. 다음날 공주의 집 주위를 한창 서성거리던 종두는 집으로 들어가 강간하려 하지만 공주가 정신을 잃자 급히 서둘러 집을 나선다.


한편 홀로 남은 공주에게 세상은 너무나 비정했다. 돈 받고 밥 챙겨 주는 옆집 여성은 공주의 집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다른 남자와 정사를 나누고, 공주 명의로 장애인 주택을 분양받아 이사 간 가족도 정부에서 감독이 올 때만 잠깐 공주를 데려온다. 혈육에게조차 버려진 짐짝 취급을 받은 공주는 결국 종두가 남겨둔 연락처로 전화를 걸고, 둘은 서로를 알아가며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종두의 구속으로 결말이 난다. 종두에게 사랑을 느낀 공주는 종두와 정사를 나누는데 공주의 가족에게 발각된다. 공주는 그것이 성폭행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였다고 격렬하게 말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결국 종두는 성폭행 혐의로 고발되고 또다시 구속되었으며 공주는 그가 출소하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혼자 살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는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하모니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 하모니 속에는 해명되어야 지점들이 숨어 있다. 첫 번째, 공주가 종두에게 느끼는 사랑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호하다. 분명 종두는 공주를 성폭행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그가 공주를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폭력을 행사해도 상관없는, 타자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주는 그런 종두를 너무나도(!) 쉽게 용서하고 사랑에 빠진다. 물론 변명의 여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때문에 대다수의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영화에서 겨우 건져낸 변명은 공주가 이미 세상과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비가시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하는’ 종두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너무 쉽게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공주라는 인물의 주체성을 상당 부분 박탈한다. 이와 같은 설정은 이창동 감독의 남성 중심적인 사고에서 기인하며, 이후 그의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때문에 공주는 「오아시스」에서 무려 여주인공이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공주는 말할 수 있는가? 이때의 ‘말’은 음성언어, 대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온전히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수단을 지칭한다. 아무리 꼼꼼하게 영화를 봐도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장애 +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하여 이중의 억압 상태에 놓여 있는 공주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렇다 할 표현을 하지 못한다. 그녀의 행보는 항상 종두에 의해 결정된다. 종두의 가족 식사자리에 가는 장면에서 그는 공주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는다(그리고 종두가 자신의 아버지를 사고로 죽였다는 사실도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멜로적 요소가 다분히 들어간 장면, 자동차 도로 위에서 종두가 공주를 안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도 그녀의 의사는 가볍게 무시되고 그저 웃기만 한다. 이렇게 볼 때, 공주가 종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순순히 따르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때문에 「오아시스」는 별개의 서사장치를 사용한다. 그것은 바로 공주의 환상이다.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환상은 이 영화의 멜로를 구성하고 완성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수단이 된다. 아마 감독이 환상을 사용한 것은 공주 또한 종두를 사랑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환상은 멜로를 극대화시키는 데 무척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 환상은 의도대로만 작동되지 않고 영화 내에 숨어 있는 다른 지점을 드러내는 듯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공주의 환상은 비장애인의 신체에 대한 선망에서 비롯된다. 환상은 주로 공주와 종두의 데이트 장면에서 나타나는데 휠체어에 타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서 그와 춤을 추거나 키스를 하는 따위의 것들이다. 환상 속에서 그들은 스킨십을 하거나 티격태격 싸우는 등 다른 연인들과 비슷한 사랑을 나눈다. 이때 세상은 으레 연인들이 그러하듯 둘만의 무대가 된다. 이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그 어디에도 없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공주의 환상 속에서 현실에서는 그렇게 말이 많던 종두가 침묵을 지킨다는 점이다. 현실과는 정반대로 공주는 대화를 이끌어가고 종두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인다. 공주가 말을 걸어도 종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이 이끌고 싶은 공주의 욕망이 투사되어 나타나는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지만, 환상에서조차 그들은 소통하는 데 대단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둘 사이의 불균등한 위치를 드러낸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조건들 중 하나로 소통을 꼽는다면, 종두와 공주의 사랑은 그 시작단계부터 삐거덕거리는 나사 빠진 사랑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공주의 ‘말’은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 폭발한다. 둘의 정사가 발각되고, 성폭행 혐의로 경찰서로 끌려간 종두를 대변하기 위해 그녀는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형사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이미 성폭행 피해자 프레임에 갇혀버린 공주는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보여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저 분노하여 몸부림치는 것으로 치부될 뿐이다. 즉 공주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은 욕망이나 정체성을 가진 한 사람이 아닌 피해자 담론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며 다각적인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장벽으로 기능한다.(이 양상은 「오아시스」뿐 아니라 더 직접적으로 장애인 성폭력을 다룬 「도가니」(2011, 황동혁 감독)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녀의 성적 욕망은 너무도 당연하듯이 거세된다. 이는 형사의 태도에서 잘 드러나는데, 체포된 종두에게 했던 말, “너 변태지?”라거나 “솔직히 성욕이 생기데?”라는 대사에서 공주의 주체성, 성적 욕망은 가차 없이 삭제된다. 때문에 그녀는 또다시 세상에서 지워진다. 영화 초반에는 종두의 성폭행 시도에 의해 주체성을 잃어버렸다면 후반에서는 경찰과 가족을 포함한 주위의 시선에 한 번 더 제거된다. 이 두 양상은 사뭇 다르게 보이지만 실상은 동일한 맥락을 가진 억압기제인 셈이다.


지금까지 아주 거칠게나마 공주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오아시스」를 읽어나가 보았다. 사적인 감상을 털어놓자면, 약 7년 전에는 인물들의 감정선에만 몰입해서 보았던 영화가 지금은 불편하게 느껴졌고 이 글은 그 불편함에 대한 고찰이자 필자 나름대로의 반성문이다.


공주가 종두를 통해 마주한 세상은 거울에 반사된 빛이 만들어낸 비둘기 형상의 환상도 아니었고 오아시스와 같은 곳도 아니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당에서 내쫓으며 그 누구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차디찬 얼음벽과 같은 세상이었다. 그런 공주에게 종두는 자신을 내맡기고 지탱할 수 있는 오아시스였고 종두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시작 지점에서부터 어긋났으며 (「오아시스」는 열린 결말로 끝났지만) 마지막 지점도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안개’를 외면해선 안 된다. 비록 한 치의 앞도 구분이 되지 않지만 안개를 응시하고 새로운 길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소모적이거나 폭력적인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 ‘너’와 ‘내’가 존중받는 사랑을, ‘나’의 목소리가 온전히 ‘너’의 몸에 닿는 사랑은 가능할 수 있을는지.

 

 

홍성훈의 난장판

뇌병변 1급 장애인.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서정주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열등감이었다'. 일반 초중고에서 비장애인 친구들과 공부했고 친구들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지금까지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으나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려고 한다. 현재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준비 중이며 인정투쟁이 아닌 또 다른 논리로 소수자를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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