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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사랑방, 오늘 이곳에서 감염인 인권이 한 뼘 자랐습니다.
시민 모금으로 생긴 PL사랑방, 감염인 인권의 시작이 되는 곳
등록일 [ 2016년05월03일 15시03분 ]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 간사로 활동하는 정욜님의 칼럼 <헬로! 레드리본>을 시작합니다. 레드리본은 에이즈 예방과 인권의 상징입니다. 시민들의 모금으로 2015년 11월 국내 처음 개소한 PL(피엘)1)사랑방,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월 한 번씩 전합니다.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에서 함께 활동하는 형들은 안전하고 편안하게 올 수 있는 공간을 늘 원했다. 차 한 잔 마시고 밥 한 끼 나누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나를 볼 때마다 “밥은 먹고 일해야 한다”며 이야기해주곤 했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안정적으로 회의할 수 있는 공간조차 없었다. 주소지는 환자단체연합회 사무실로 두고 있었지만 감염인을 위한 독립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다 보니 그곳에서 모임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운영진 몇 명이 회의하고 나오는 게 전부였다. 사람이 모여야 일도 도모할 수 있는 법, 사람을 모을 수 없으니 가볍게 수다를 떠는 모임조차 운영하지 못했다.
 

가톨릭에서 10평 남짓한 레드리본센터를 운영해왔다. 그곳에 모여 식사도 하고, 묵주나 향초를 만드는 재활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노래연습도 하고, 영화도 보고, 서울근교에 산책하러 함께 나가는 등 감염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 일종의 아지트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2015년 7월경 공간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자 형들은 자신들을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이유로 담당 신부님을 찾아 항의도 하고 공간을 계속 유지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탄원서를 작성해 제출하기도 했지만 가톨릭의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형들은 감염인들의 공간을 자기네 맘대로 처리하려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엄밀히 이야기하면 레드리본센터의 주인은 가톨릭이었다. 감염인 스스로 운영하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톨릭 마음대로 운영할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었다.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야 했을 감염인들로부터 항의를 받았기 때문이었을까. 결국 가톨릭은 더 이상 공간을 운영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비슷한 시기 PL사랑방을 만들기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감염인이 직접 운영하고, 감염인이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 우리의 약속은 12월 1일 세계에이즈의 날 전에 개소하는 것이었다. 3천만 원이라는 모금 목표액도 정했다. 주어진 시간이 5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가톨릭이 2016년부터 레드리본센터를 운영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고 안 할 수도 없었다. 누구나 안다.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간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람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다는 것을.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야 하는데 모금 같은 걸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방법을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간절함을 이길 수 없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누구보다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여건이 되는 만큼 만 원, 이만 원 보태는 분들부터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 하나둘 정성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구경북PL자조모임 해밀은 매월 회비로 모은 운영비 10만 원을 보내주었고, 감염인 동료 간병을 하며 하루 24시간 근무하는 형은 100만 원을 선뜻 내놨다. 한국에이즈예방재단에서는 300만 원을 기탁했고, 구속 수감되어 있던 박래군 인권활동가는 영치금 일부를, 인권운동사랑방은 책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인세 일부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에이즈인권운동을 가까운 곳에서 봐 온 사람들의 참여가 PL사랑방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총 153명, 2,500만 원이라는 소중한 후원금이 모였다.

PL사랑방 개소를 앞두고 2015년 10월 30일 열린 KNP+ 후원의 밤 모습 ⓒ정욜
동숭동에 있는 PL사랑방, 약속대로 작년 11월에 개소했다. 방 2개, 한 방은 사무 공간이고 한 방은 회의공간이다. 주방 겸 거실에선 식사도 하고 앉아서 차도 마신다. 가정집이라 따뜻한 기운이 늘 남아있다. 비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감염인들이 찾아온다. 사람이 보고 싶어서 오기도 하고, 시내 나가기 전에 잠시 들르기도 하고, 처음 온 분들은 집들이라도 온 것처럼 두 손 가득 선물을 챙겨오기도 한다. 언제 가도 자신을 환영해주고 힘들 때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든든한 마음이 들 것이다. 이제 유료 세미나 공간을 찾아다니며 회의하는 일도 없어졌다. 공간이 생기니 프로그램도 많아졌다. 4월부터는 신규 감염인을 초대해 확진, 가족, 연애, 건강 등 주제를 정해 이야기를 나누는 ‘오픈마이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감염인 자조모임 운영진들이 모여 동료상담원 교육을 시작하기도 했다. 유엔에이즈 지원으로 진행되는 설문조사도 대개 PL사랑방에서 진행된다. ‘밥’을 중요시하는 형들 덕분에 밥 먹고 회의를 시작하는 건 이제 익숙해진 풍경이다. 너도나도 챙겨온 밑반찬으로 PL사랑방의 냉장고는 항상 음식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이 찾아오는 만큼 사연들도 이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번 주 회의에서는 의료인의 질병정보 비밀누설로 직장까지 잃게 되었다는 상담이 접수되었다. 얼마 전에는 대학병원에서 혈액투석을 해 주지 않아 병원을 급히 옮겨야 했던 사연도 있었고, 중증에이즈 환자들이 요양병원 찾아 삼만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너무 자주 듣고 있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그동안 참고 넘어갔던 차별의 경험은 하나하나의 사례가 되어 이곳에 쌓이고 있다. 에이즈 공포에 감염인을 터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더 악화하여 가고 있고 이곳에 모인 사연들도 점점 무거워지고 있지만, PL사랑방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염인들의 비빌 언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한 편에선 안도감도 든다.
 

이곳에 방문하는 많은 분이 인권이라는 단어를 어색해하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PL사랑방은 비가 오면 잠시 피할 수 있는 곳, 따뜻한 밥 한 끼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차별의 경험을 참고 감내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힘을 키우는 곳. 인권단체 중에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웃기도 하지만 질병이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인권의식이 서로에게 빠르게 전염될 수 있는 그런 곳. 이곳은 쉼의 아지트이기도 하지만 투쟁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권운동의 히든카드는 이들일지 모른다. PL사랑방이 만들어진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켰을 뿐이다.

1) PL은 People Living With HIV/AIDS의 약자로서 HIV/AIDS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HIV/AIDS, 에이즈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PL(피엘)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며 사용하고 있다. 

 

정욜의 헬로! 레드리본
10년 넘게 HIV/AIDS감염인과 함께 인권에 관해 이야기해왔다. 지금은 감염인 인권운동의 자력화를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에이즈 인권운동을 하며 ‘더러운 좌파’라는 낙인도 찍혔지만 감염인들은 내 삶에 든든한 힘이 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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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욜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 간사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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