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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100년] “그곳에서 부부로 같이 살려면 단종·낙태를 해야만 했다”
[인터뷰] 조영선 한센인권변호인단 변호사
‘국가책임 없다’고 항소하면서 소록도 100주년 기념하는 한국 정부
등록일 [ 2016년06월21일 16시10분 ]
올해로 국립소록도병원이 100주년을 맞았다. 전신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설립된 자혜의원이다. 일제는 치료를 이유로 한센병 환자를 이곳에 강제수용했다. 설립 당시엔 100명 안팎이었지만, 1940년엔 최대 6136명까지 있었다. 그땐 하루에 한 명꼴로 사람이 죽어 나갔다. 치료와 감염 예방을 이유로 강송 당해 끌려온 이들은 섬 안에서 강제노동과 단종·낙태를 당했다. 이는 해방 후에도 지속됐다. 한센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섬 바깥에 한센인 정착촌을 만들 때면 늘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딪혔다. 설령 정착촌에 살 수 있게 되어도, 한센인 2세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에겐 미감아(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란 딱지가 붙었다. 한센인들은 목욕탕도, 식당도 갈 수 없었고, 버스도 타지 못했다.

그러나 한센병은 1940년대에 이미 완치 가능한 질병으로 분류됐고, 1970~80년대엔 실제 대부분이 완치됐다. WHO 기준(인구 10만 명당 유병률 15명 이하)에 따라 한국은 1980년대에 한센병 퇴치 국가가 됐다. 따라서 현재 ‘한센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이미 완치된 ‘한센병력자’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고, 유전병이 아님에도 1980년대까지 한센인에 대한 단종·낙태 수술이 자행됐다.

2007년 ‘한센인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아래 한센인사건법)’이 제정됐다. 이 법에 근거해 정부는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고, 위원회에서 피해 사건으로 인정받은 자에 한해 생활지원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규모는 한 달에 15만 원. 이마저도 모두에게 지급되진 않았다.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으로 제한됐다. 결국 법에 의해 피해자로 인정된 사람 중 대표적 인권침해인 단종·낙태에 대해서만이라도 피해 배상과 명예회복을 받고자, 2011년 10월 한센인권변호인단은 소송을 제기했다. 20일에는 소록도 현장에서 특별재판도 열렸다.

정부는 지난 5월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하지만 한센인에게 자행된 국가폭력에 대해선 인정할 수 없다며 계속 항소하고 있다. 정부가 ‘지우고 싶은’ 한센인의 역사는 무엇인가. 한센인 단종·낙태의 국가 책임을 묻는 이번 재판에서 한센인권변호인단에 참여하고 있는 조영선 변호사를 만나 이번 소송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조영선 한센인권변호인단 변호사

# “소록도에선 부부가 같이 살려면 단종·낙태를 해야만 했다” 


- 단종·낙태 소송엔 몇 분 정도 참여했나.


소송은 총 6건이 진행중이고, 돌아가신 분 포함해서 539명(단종 271명, 낙태 268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 중 20~30% 정도 돌아가셨다. 단종·낙태 피해자가 이 외에도 더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진상규명위원회 피해신고 당시 홍보 부족, 본인의 무지 등으로 여러 피해 중에 하나만 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 단종·낙태에 대해서만 소송 제기한 이유는.


입증은 어렵지만 가장 반인륜적이다. 분명하게 잘못됐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다. 국립요양소 등에서 일제히 실시했기에 집단 피해성을 갖는 것이다.


- 하지만 개인의 역사에서 말하기 어려운 부분 아닌가.


단종보다는 낙태에 대한 기억으로 상당히 힘들어하셨고… 울기도 하셨다. 낙태 방법이 아래에서 끄집어내는 것도 있지만, 배에다가, 그러니깐 아이 머리에다가 주사 놨다는 증언이 많았다. 그러면 아이가 죽는다. 이후 약물로 꺼낸다. 칠곡에 있는 분은 그렇게 낙태했는데, 아이가 바로 안 죽은 거다. 그런데 좀 있다 죽을 거란 말이지. 간호사와 의사는 갖다 버려야 하는데 어찌할 줄 모르다가 결국 수술 끝난 이 산모한테 ‘당신이 버리라’고 했다. 그래서 자기가 낙동강 근방 탄천 갈대숲 있는 곳에 놓고 왔다고 한다. 그 밤에 걸어오면서 어찌나 울었던지,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렇게 아이가 살아버렸을 때, 병원에서도 어찌할 수 없으니 묵인 하에 키우기도 했다. 십여 살까지 소록도에서 살다가 밖으로 내보낸 사례도 있었다. 박모 할머니 경우엔 닭장 안에서 아이를 낳았다. 꼬꼬댁 소리랑 아이 울음소리랑 섞이니깐. 그렇게 아이 키워서 밖으로 내보내고. 소록도에선 가임 여성에 대해 정기적으로 배를 만져보거나 들춰보는 식으로 조사했다. 밀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당했는데 너는 왜” 이러면서.


- 한 번만 당한 게 아니라 임신할 때마다 계속 낙태시키지 않았나.


그렇다. 소록도에선 공식적으로 결혼하는 게 아니라 소위 ‘연애한다’고 표현한다. 몰래 만나서 아이 배게 되면 낙태 당하고, 상대방이 누구냐, 물으면 말 안 하고. 상대방이 단종 당할까 봐. 밖으로 도망 다니다가 또 강송 당해서 들어오면 아이 배서 또 낙태 당하고.


- 정착촌으로 나가 살 순 없었나.


현실적으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정착촌 가려면 정착촌에 나를 보증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입주에 대한 허가금이 있어야 했다. 소록도병원의 통제도 받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쪽도 기본적으로 단종·낙태를 시행했다는 거다. 정착촌이라고 자유로운 게 아니다. 소록도 내에서 한센인에 대한 징계 숫자 중 ‘도주’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도주해도 강송으로 다시 끌려 들어온다. 밖에 나가면 구걸해야 하는데 결국 동사하거나 아사한다. 여기서 나간다는 게 아무 의미 없는 거다.


# 법 제정에서 단종·낙태 소송에 이르기까지

2001년, 일본에선 한센인에 대한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구마모토 지방재판소가 한센인 강제격리정책의 법적 근거였던 ‘나 예방법’에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에 일본 정부는 항소를 포기하고 그해 ‘한센병요양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법 전문엔 ‘한센인 격리와 인권침해에 대해 사죄하고 명예회복을 도모한다’고 쓰여있다. 이 법에 근거해 일본 정부는 입소 기간에 따라 1인당 800만 엔~1400만 엔(한화로 8천만 원~1억4천억 원)까지 피해자들에게 일괄 손해배상했다.


2003년, 일제강점기 소록도에 입소했던 한국 한센인들도 이 법을 근거로 일본 정부에 보상금을 청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듬해, ‘대한변협 인권위원회 산하 소록도보상청구소송 대한민국 변호단’이 구성됐다. 이들은 일본 재판소에 보상금 청구 거부 처분에 대한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2005년, 일본 재판부는 한국 소록도에 기각 판결을 내리면서 같은 날, 대만 낙생원에 대해선 피해를 인정했다. ‘국립요양소 등’에 ‘외지’인 한국과 대만이 포함되느냐가 쟁점이었는데, 대만은 포함되지만 한국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모순된 판단을 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2006년 “전쟁 전에 ‘국외’에 있던 한센병 요양소에 대해서도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규모는 1인당 800만 엔(8000만 원가량)이었다. 개정 이유로 일본은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을 위로하고 사죄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한국과 대만 피해자 모두 보상을 받았다. 한국의 경우, 올해 5월 12일로 590명에 대한 보상 청구가 모두 완료됐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07년 한국에서도 한센인사건법이 제정되고, 피해자 지원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법은 국가폭력의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하는 법이 아니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 2007년 제정된 법으론 ‘일괄 배상’받지 못해 소송을 제기한다고 했다. 일괄배상과 현재의 피해자 생활지원은 법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나.

배상은 국가의 고의 과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반면, 생활지원은 복지적 지원의 성격이다. 네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의료적 치료를 받아야 하니깐 돌봐준다는 배려적‧사회복지적 차원이어서 국가 책임 인정한 게 아니라고 봐야 한다. 2008년 법이 시행됐지만 실질적인 지급은 2012년부터 됐다.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보상 결정하고 예산 편성하다 보니 늦어졌다. 한 번에 지급해서 이걸로나마 심리적 위안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정부는 이들이 죽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


- 국가책임 문제와 관련해 논란이 된 쟁점은 무엇이었나?


여러 쟁점이 있다. 국가 정책으로 했나, 소록도에서 자체적으로 했나, 자기 자율로 한 건가, 강제로 한 건가. 이런 차이가 있다. 당시 모자보건법, 전염병예방법에는 ‘질환의 유전 혹은 전염 방지를 위해 불임수술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긴 하나 이는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해방 후 1949년도에 제정된 ‘요양소 수용환자 준수사항’을 보면 ‘부부 동거실’은 단종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소록도 외 바깥에서 살 수 없는 한센인들에게 단종·낙태에 대한 ‘자발적 선택’은 성립될 수 없었다. 아이를 낳은 뒤 접촉에 의한 감염 우려는 다른 정책적으로 풀어야 할 것이지, 아이 낳을 수 있는 기본적 권리마저 차단될 이유는 없다.


- 그럼에도 계속 국가가 항소하는 이유는 뭔가.


정부는 ‘단종·낙태 당했다는 입증 부족하다’, ‘어떻게 옆 사람 말 한마디로 인정할 수 있느냐’며 피해 사실을 부인하려고 한다.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의사 아니었냐고 한다.


- 일본에서 보상금 지급 기준은 어땠나.


단순 명쾌했다. 한센인이라는 사실, 해방 전에 소록도에 한센인으로 입소한 것 정도만 확인했다. 한센인이라는 것은 한센등록카드가 있어서 대부분 입증된다. 문제는 소록도 입소 시기다. 성씨별 연명부, 병원별 발급 입소증명서 등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입소 날짜가 일부 입증됐다. 그 외엔 ‘내가 소록도에서 이 사람이랑 같이 놀았다’, ‘벽돌 지는 거 봤다’하는 피해자 증언만으로 전부 인정해줬다. 집단적 군락 생활했기에 나의 경험을 공유하는 게 있어서 거짓말 할 수가 없다. 595명 보상 청구해서 590명 인정받았다. 나머지 5명은 취하했다. 한 명은 해방 후 입소한 사람인데 시기를 잘못 알아서, 4명은 한센등록카드가 없어서.

소록도 내에 있는 검시실

# ‘국가책임 없다’고 항소하면서 소록도 100주년 기념행사하는 한국 정부


- 정부 항소가 계속되는 와중에, 정부는 올해 소록도 100주년이라며 각종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를 보는 심경이 조금 남다를 것 같다.


한센에 관한 의사, 간호사 등에 의한 치료의 역사도 있지만 그 안엔 많은 인권침해로 희생당한 한센인의 역사도 있다. 우리는 그 아픈 역사까지 기억해야 한다. 한센인 역사를 발굴하게 된 계기는 2001년 일본의 구마모토 판결 덕분이다. 이를 통해 강제격리가 잘못됐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이후 일본 보상청구 소송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100주년 행사 때 이에 대해선 단 한마디 말도 없었다. 마리안느 수녀의 헌신과 봉사, 이것도 그 자체로 의미 있고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한 역할이 있었으니 이만큼 온 거다. 하지만 이번 100주년 행사에서 한센인 당사자들은 들러리가 됐을 뿐이다. 관제행사였다.


-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시민사회계와 연대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은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변호인단의 한계이기도 하고, 또 하나는 한센 관련한 시민사회단체가 변호인단 외에 없기도 하다. 봉사단체만 있다. 한센인 단체도 사안별로 협조해주는 정도지 폐쇄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수십 년 동안 그 집단 안에서만 살았기에 집단 논리, 집단 정서가 존재한다. 시민단체 쪽으론 잘 안 됐다. 한센인 문제를 논점으로 할 수 있는 단체는 이미 각자의 이슈가 있었다. 소록도병원을 향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사회적 의제로 만들지 못했다. 단순히 복지부 정책 수단으로만 남는 건 문제 있다.


- 마지막으로 사법부에 전하고 싶은 말은.


2011년도에 1차 소송 제기한 지 5년이 지났다. 대법원은 1년 7개월이 지나도록 침묵하고 있다. 이 사건은 큰 쟁점도 없고 고도의 법리적 의견이 들어갈 게 아니다. 판단의 문제다. 소송 지연시키는 게 패소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재판에서 이겨도 무슨 의미가 있나. 대법원은 하급심이 판단할 수 있도록 선행적으로 판단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피해자들이 위로 받을 기회가 생기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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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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