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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몸이여, 내가 언제나 질문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를”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 ⑥
등록일 [ 2016년07월13일 20시26분 ]
[편집자 주] 끔찍한 말들이 떠돌고 있다. 할퀴는 말, 증오를 선동하는 말, 차별과 폭력을 부르는 말, 무엇보다 그걸 즐기는 말들이. 그 말들은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소수자들을 겨냥한다. 여성, 동성애자, 이주자,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담론이 분출하고 있다. 언제 부터일까, 대략 2000년대 이후 온라인의 ‘일베’와 오프라인의 개신교 우파를 중심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과 폭력을 선동하는 담론이 노골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작금의 혐오담론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무분별하게 표현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를 반영하는 사회적 담론으로, 20세기 초반의 파시즘과 유사한 정치적 욕망의 표출이다.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혐오 담론의 실체는 무엇이며, 거기 내포된 정치적 욕망은 무엇이고 그 혐오의 정치에 대항하는 정치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비마이너가 노들야학과 함께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를 열었다. 공개 모집을 통해 25명의 다양한 소수자, 인권 활동가들이 모였으며, 13주 동안 8권 정도의 텍스트를 읽고 토론할 예정이다. 그 토론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연재하려 한다.

<<‘혐오담론 씹어먹기’ 연재 목록>>
혐오표현? 문제는 혐오정치야!
‘인류애’로 혐오하는 자들에게 마사 누스바움이 전하는 ‘인류애의 정치’
일베의 사상을 넘어 견유주의적 가치전도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여성혐오로 발기된 남근의 정치학과 함께
‘핑크코끼리’와 ‘주토피아’가 공유하는 혐오의 사상, 사회진화론적 문명사관

 

강남역 살인사건은 각기 다른 소수자 혐오들이 연관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경찰은 피의자의 정신병력을 근거로 이 사건을 여성 혐오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로 단정 지었다. ‘조현병’이라는 개정된 병명이 있음에도 경찰은 굳이 ‘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정신분열증에 대한 오래된 편견에 기대어 피의자의 여성 혐오를 덮으려 애썼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한편의 과대평가와 다른 한편의 과소평가로 이뤄져 있다. 우선 그 편견은 정신질환자의 여러 인격적 특질(한국인, 남성, 빈민, 난폭한 성격, 가부장적 세계관 등) 중 하나에 불과한 정신질환이 그의 인격 전체를 규정짓는다고 여기는 과대평가를 내포한다. 다른 한편, 정신병의 내용(망상 등)은 사회관계나 문화적 특질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에도, 그 편견은 정신병이 무의미한 신경질환이며 개인적 소질에 불과하다고 과소평가된다.
 

정신병에 대한 편견은 ‘정신병자는 위험하다’는 편견으로 귀결된다. 푸코의 말처럼, ‘광기’를 대신하여 ‘정신병’이라는 개념이 ‘정신의학’과 함께 탄생한 곳은 환자들이 있는 병원이 아니라 범죄자들이 들락거리는 감옥, 경찰서, 법정 같은 치안권력의 장치이다. 19세기 서구사회에서 ‘정신병’은 ‘정상성’에 대한 일탈로 정의되었고, 그 일탈의 ‘위험성’ 속에서 감금의 대상으로 제도화되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화로 정신병자의 강제입원과 사후관리를 경찰의 고유 권한으로 지정하려는 강신명 경찰청장의 노력은 지극히 교과서적이면서 시대착오적이다.
 

정신질환에 대한 이런 시대착오적인 편견과 대응에 견주어 봤을 때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오히려 새롭다.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 출신의 파농은 정신의학자로서 정신질환의 사회·문화적 요인을 철저히 분석했으며 폐쇄병동과 강제입원, 장기입원을 철폐하고 환자 중심의 개방적인 주간 병원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파농이 주목한 정신질환의 사회, 문화적 요인은 식민주의적 인종 혐오이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인종주의적 혐오, 동화정책 속에서 흑인에게 내면화된 흑인 혐오, 흑인들의 자기혐오, 자기 소외, 자기 분열로 인한 정신질환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분석된다. 또한, 알제리에서의 정신병원 개혁은 그 병원으로 몰려든 알제리 민족해방 전사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식민지 사회의 개혁, 즉 사회주의적 민족해방 운동으로 이어졌다.
 

파농에 따르면 인종 혐오, 특히 흑인 혐오는 몸에 집중된다. 흑인의 몸, 가시화된 몸, 검은 피부,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과거의 역사, 현재의 행위, 미래의 가능성 그 모든 것이 ‘검은 피부’에 의해 결정된다. 흑인의 몸은 야생의 몸이고, 노예의 몸이며, 본능의 몸, 성적인 몸이다. 아무리 백인처럼 말하고 백인처럼 사유하고, 백인처럼 처신해도 소용없다. ‘하얀 시선’ 속에 가시화된 ‘검은 피부’가 실존의 본질을 규정해 버린다. 같은 인종차별의 대상이지만 유대인은 발각되고 나서야 푸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흑인은 보이는 즉시 차별받는다.
  
흑인의 손 ⓒ픽사베이

나는 매사가 처음 보는 모습이다. 어떤 기회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외부에서부터 중층결정 되었다. 나는 타인들이 나에 대해 가진 ‘관념’의 노예가 아니라 내 ‘외관’의 노예이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문학동네, 113쪽)
 

흑인의 몸에 대한 여러 편견 중 정신분석을 요하는 것은 성적인 과대평가이다. 흑인의 몸은 진화가 덜 된 몸이고, 야생의 몸이며, 그렇기에 본능에 사로잡힌 몸, 성욕으로 충만한 몸이라는, 우리사회에도 익숙한 편견 말이다. 그 때문에 성적 금욕주의에 사로잡힌 수많은 백인 중산층 여자들이 흑인과 옷깃만 스쳐도, 길거리에서 흑인을 보기만 해도 히스테리 발작, 마비 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흑인의 가시화된 몸이 그녀들의 억압된 성 충동을 폭발시켜 히스테리 증상으로 표출된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런 ‘검둥이 공포증’ 때문에 흑인에 대한 혐오 범죄의 상당수가 ‘거세’를 동반했다.
 

그들은 유대인을 죽이든가 살균처리한다. 그러나 검둥이는 거세당한다. 정력의 상징인 남근이 부정당해 없어진다. (…) 유대인은 자신의 종교적 인격, 역사, 종족, 조상 및 후손과 맺는 관계에서 타격을 입는다. (…) 그렇지만 검둥이의 경우 그들이 타격을 가하는 것은 그 신체성이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문학동네, 157쪽)
 

식민지 동화 정책 속에서 흑인들은 스스로 자기 몸을 부정한다. 백인(프랑스)의 언어로 말하고, 백인의 역사를 배우고, 백인의 영화와 드라마에 감동하고, 백인의 철학으로 사유하면서 그들은 하얀 영혼을 갖게 되고, 자신의 까만 몸을 부정하기 위한 몸부림을 친다. 우선, 흑인 유학생들은 백인(프랑스)의 언어와 문화를 통해 ‘하얀 가면’을 쓴다. 물론 그 가면은 식민지 흑인사회에서만 통할 뿐 백인들에게는 가차 없이 벗겨진다. 흑인 여성들은 백인의 아이를 가짐으로써 흑인의 몸을 탈피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물라토(mulatto, 백인과 흑인의 혼혈) 여성은 자신을 백인으로 여긴다. 그래서 어느 물라토 타자수 여성이 대졸 회계원 흑인 남성에게 구애 편지를 받았을 때 그녀는 감히 흑인이 백인 여성을 능욕했다며 법원에 고소했다.
 

흑인 남성은 백인 여성을 ‘정복’함으로써 백인 남성에 대한 열등감을 만회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느 흑인 남성은 금발의 성매매 여성과 성교 중 오르가슴 순간에 소리를 질렀다. “쇨셰르 만세!” 쇨셰르는 프랑스 제2공화정 때 노예무역을 폐지한 인물이다. 또 어느 소설 속 흑인 남성은 오랜 프랑스 유학생활 속에서 프랑스의 교양을 습득하여 동료 백인들로부터 “넌 우리와 같아”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백인 여성의 사랑을 끝내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백인 여성의 순백한 살결”에 대한 ‘흑인’의 성욕을 발견했기 때문이며, 그 욕망 속에서 “수세기에 걸쳐 내 종족에게 가해를 입혔던 백인”에 대한 증오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포기’는 이중적이다. 백인 여성을 향한 사랑의 포기에 백인 남성을 향한 증오의 포기가 중첩된다. 그의 ‘포기 신경증’은 ‘흑인성’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흑인 청년이 있었다. 그가 농기구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 농기구 이름이 뭐였죠?” 아버지는 그 농기구를 아들의 발등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아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그 농기구의 크리올(식민지 토착 불어) 이름이 떠올랐다. 프로이트가 『일상생활의 정신병리』에서 보고한 ‘단어 망각’의 사례와 유사하다. 그 청년의 단어 망각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크리올을 쓰는 식민지 흑인인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그의 단어 망각은 ‘흑인성’의 억압에 기인했다. 그것을 간파한 아버지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의 단어 망각을 치료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폭력적으로 대면시킨 것은 단지 농기구의 사물성이 아니다. 그것은 ‘흑인’의 사물성, 즉 흑인의 몸이다. 억압된 흑인의 몸이 아픔을 통해 각성하자 망각된 크리올 단어도 떠오른 것이다.
 

파농은 알제리 민족해방 전쟁 과정에서 다양한 정신질환에 걸린 이들을 만났다. 아내가 프랑스 정부군에게 성폭행당한 ‘알제리 민족해방 전선(FLN)’ 소속원의 발기부전 증세, 프랑스군의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느끼는 무차별적 살인 충동, 일시적인 광기로 친불(親佛) 인사의 부인을 살해한 민족해방군인의 중증 불안 장애 등 식민지 해방 전쟁은 정신질환의 총체적 방아쇠로 작동했다. 파농은 폭력의 긴장으로 경직된 흑인의 몸과 그들의 붕괴된 자아를 목도했다. 그러나 정신분석으로 해 줄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풀려나야 할 건 무의식이 아니라 식민지 사회 전체였기 때문이다. 가령 13, 14세 알제리 소년 둘이 유럽인 급우를 칼로 난자한 사건이 있었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 아이와 전혀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요. (…) 어느 날 우리는 그 아이를 죽이기로 했어요. 유럽인들이 아랍인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니까요. 우리가 어른들을 죽일 힘은 없지만 또래 아이들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죠. 우리는 그 아이를 도랑에 처넣었는데, 작은 상처밖에 입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집에서 칼을 가져와서 그 아이를 찔러 죽였어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307쪽)


그 아이들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그 아이들은 미쳤는가? 미치지 않았는가? 그건 정신질환 범죄인가? 증오범죄인가? 그런 구분이 도대체 가능한 것일까? 프란츠 파농은 그 아이들에게 아무런 정신분석도 하지 않았다.

(왼쪽)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문학동네, (오른쪽)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파농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에 가입했고, 알제리 공화국 임시정부로부터 순회대사로 임명받아 여러 국제회의에서 연설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연설이 ‘우리는 왜 폭력을 선택했는가?’이다. 그는 식민지의 해방은 본국과의 협상이 아니라 식민지 민중들의 무장투쟁에 의해서만 온전히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다.
 

파농은 식민지 해방 전쟁 속에서 “원주민의 근육이 언제나 이주민을 공격할 수 있도록 늘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프로이트가 말한 ‘공격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파농은 이 공격 충동을 식민지 ‘보디 폴리틱(body politic)’의 ‘죽음 충동’ 현상으로 보았다. 즉,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주의적 사회 기관들의 해체와 파괴를 향한 충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지도자들, 민족을 대변하는 정당들은 그 긴장과 공격 충동을 부정적으로만 본다. 그들은 “식민지 본국의 폭력에 폭력으로 응대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을 찾는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식민지 본국과의 ‘협상’을 통해 새로운 지배 권력을 위임받는 것이다. 하지만 파농이 ‘폭력을 선택한’ 이유는 민족해방투쟁에서 새로운 지배권력, 새로운 ‘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식민지 민중이 민족해방에서 폭력의 역할을 떠맡을 경우 민중은 어느 누구도 ‘해방자’로 자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 폭력의 행사는 그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각 개인은 폭력이라는 커다란 사슬의 고리들이 된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117쪽)

클라스트르라는 인류학자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비서구 원주민 사회의 잦은 전쟁은 공동체가 지배-피지배 계급으로 분화되는 것, 즉 ‘국가’ 체제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국가 저지 장치’라고 분석했다. 전쟁 속에서 우두머리는 사지에 몰릴 뿐 결코 지배자의 ‘질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이미 지나간 원시사회가 아니라 국가 소멸을 위한 사회주의적 실천이다. 파농은 탈식민화 과정에서 죽음 충동에 사로잡힌 원주민 사회의 무장투쟁에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적 실천을 본 것이다.
 

푸코는 권력이 항상 몸을 겨냥한다고 했다. 파농은 흑인의 몸에 대한 혐오의 시선 속에서 식민주의적 권력의 작동방식을 보았으며, 죽음 충동에 사로잡힌 식민지 원주민 사회의 ‘보디 폴리틱’ 속에서 국가에 대항하는 민중 권력의 출현을 보았다. 파농에게 몸은 항상 ‘질문’을 야기하는 곳이다. 진실한 ‘질문’은 관념이 아니라 몸에서 생긴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몸, 흑인의 몸, 장애인의 몸, 여성의 몸, 성소수자의 몸은 우리 사회의 지배 권력에 대한 질문이, 저항의 물음이 생기는 곳이다. 나의 몸이여, 내가 언제나 질문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를!”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문학동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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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lizom@hanmail.net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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