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②부 세상 속, 우동민의 자리 “나중에 집회 사진을 정리할 때 보니까요. 현장을 찍은 사진에는 어디에나 형이 있더라고요. 동민이 형은 항상 집회에 제일 먼저 나와서 가장 늦게 들어갔어요. 모든 투쟁의 현장을 묵묵하게 지키는 사람이었어요.” (박현) 인권이 무너진 곳에서 인권을 일으켜 세우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는 조직과 역할이 축소되었고 파행으로 치달았다. 2010년 7월 취임한 현병철 인권위원장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는 관심이 없고 정부와 여당 눈치 보는 데 급급했다. 인권위는 용산참사나 민간인
▷ ①부 집에서 24년, 시설에서 10년 우동민이 긴장을 덜고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는 많지 않았다. 함께 활동하는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성북센터) 동료들은 우동민이 그럴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동민이 전한 단어로 문장을 구성해 동민에게 다시 물었다. “동민이 형, 이런 뜻이야?” 동민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젖히거나 저어서 문장을 함께 완성했다. 동료 활동가 외의 사람들에게는 대개 표정이나 고갯짓, 손짓으로 의사 표현을 대신했다. 표정은 대부분 웃음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 표정, 입을 벌리고 침을 튀기며
우동민은 종로구 숭인동에서 태어났다. 발붙이고 살 땅 한 평 없는 피난민과 이주민들이 낙산 꼭대기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달동네였다. 동민의 부모는 혼인 후 마을 초입에서 작은 점방을 하는 형님네와 함께 살았다. 아랫동네에서 소주나 빵을 10원에 사 와 12원에 파는 식의 조그마한 가게였고 안쪽 모서리 방에 부부가 살았다. 날림으로 지은 집에는 수도가 없어 공동수도에서 한 통에 2원을 주고 물을 길어다 생활했다. 동민 아버지는 당시 일을 찾지 못해 형님을 돕고 있었는데 형님네도 형편이 어려워 부부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동민을 임신
▷ ⑤부 골리앗의 패배, 인천 아암도 전사들 카나리아의 몰락 이덕인 투쟁이 끝나고 얼마 뒤, 박흥수는 신내동에 방 두 칸짜리 영세민 아파트(임대아파트)를 얻어 살았다. 그리고 마침 주머니 사정이 힘들어져 거주할 곳을 잃은 이상호에게 함께 살 것을 제안한다. “제가 추진하던 투쟁 예술 사업들이 다 잘 안 되었어요. 완전 말아먹었죠. 제 보증금까지 빼서 갚아야 할 지경이었으니, 하하. 반년 동안 잘 데가 없고 그랬어요. 어느 날은 제가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 짠했나 봐요. 흥수형이 갑자기 절 불러다가 차를 끌고선 어디를
▷ ④부 죽음의 행렬,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복수 1995년 10월경, 인천 아암도에는 망루가 세워졌다. 11월 24일, 노점상들은 망루에 오른다. 망루는 30명이 족히 머물 만큼 컸지만, 어째 초라한 느낌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허름함 곁으로는 결의가 그득했다. 그러나 결의란 대개 두려움을 동반하는 법이다. 망루는 노동자들이 결사 투쟁 때 오르던 대형 크레인에서 이름을 따와 ‘골리앗’이라 불리곤 했지만, 그 웅장한 호명이 무색할 정도로 그저 위태로워만 보이기도 했다. 온통 적들로 둘러싸인 이 구조물은 바깥세상에서 잘 보이지도
▷ ③부 변방에서, 혁명의 물리적 근거를 위하여 95년 3월 24일, 성대 앞에 불길이 솟았다. 3월 25일에는 연대 앞에도 불길이 번졌다. 아직 겨울 기운을 머금어 차갑게 식어 있던 대학로와 신촌 근교 아스팔트 바닥 곳곳은 이내 뜨겁게 달궈졌다. 500여 개의 화염병이 차례로 하늘을 수놓는 동안, 경찰들이 쏘아 올린 최루탄 가스가 온 대기를 뿌옇게 메워 갔다. 곧 불길은 서울 시내 곳곳을 향한다. 억센 손아귀들에 쥐어진 돌멩이들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2400여 개의 방패 벽에 부딪히고는 그슬린 도시의 아스팔트 바닥을 마구잡
▷ ② 상담치료, 약물치료, 물리치료 투쟁 연습 89년 봄 정립회관. 세 명의 장애인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일렬로 자리해 있다. 조용하던 정립회관 운동장엔 이내 괴이한 소음이 진동한다. “자! 따라 해! 장애인복지법 개정하라!”“장애인복지법 개정하라!”“자! 이번엔!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하라!”“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하라!” 어설프게 어깨 위로 들려진 그들의 팔뚝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투쟁에 익숙한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의 팔뚝마냥 절도가 배어갔다. 그런데 정작 싸움의 대상은 당장 그들 앞에 없었다. 이들은 곧 열릴 양대 법안 투쟁을 앞두고
▷ ①부 청계천 8가, 비루한 혁명가들 박흥수는 1958년 5월 15일 영등포에서 태어났다. 다음 해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장애를 입었고 살아가는 내내 가난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진보적인 성향의 성당에 다녔는데, 훗날 그곳에서 억압받는 민중들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성당 사람들과 함께 각종 투쟁들에 연대하고 곳곳에서 주워들은 책도 집어와 읽으면서 저도 몰래 훗날 싸움의 토대를 닦아갔다. 그는 청년기에 뜨거운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금방 무너져 내린다. 사랑하
95년 4월, 장애인들이 한두 명씩 청계천 8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곁으론 온갖 물건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값싸게 사고팔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죄다 그곳에 모인 듯했다. 삼일아파트 13동 앞 끝자락, 빼곡히 들어선 노점들 틈으로 빈자리가 하나 보인다. 한 장애남성이 그 자리를 파고들어 새 좌판을 깔았다. 장애인 혼자선 장사를 하기가 힘드니 비장애인도 함께 붙어 2인 1조로 장사를 시작했다. 얼마 후 16동과 17동 사이에도 좌판 하나가 들어섰다. 날이 지날수록 장애인들이 연 좌판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13동 앞서부터 20동
▷전편: 태수야, 네가 옳았다 거리의 투쟁을 조직하다홍: 정태수 열사의 정신이라고 하면 ‘조직하라’라는 말로 대표되잖아요. 조직이란 건 운동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인데, 정태수가 했던 조직이 갖는 의미가 있을까요?박: 조직한다는 건 관계를 맺는 일인데 그는 정치인이나 엘리트를 조직한 게 아니라 밑바닥의 삶을 조직했다는 거지. 목표는 투쟁을 하는 것이었고. 그게 장애인운동의 희망이라고 생각한 거야.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조직하려고 했고 노점상 투쟁을 조직했지. 대중의 물리적 힘을 장애인운동의 희망으로 봤던 친구야. 전국장애인한가
정태수는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박경석의 (7살 어린) 친구였다. 생전의 그를 만난 적 없는 나에게 정태수에 대한 인상은 그의 장례식에서 눈과 코가 빨개져서 울던 경석의 슬픈 얼굴과 경석이 술에 취해 부르던 태수의 18번곡 ‘의연한 산하’였다. 경석은 자신의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태수’로부터 시작했다. 장애해방열사들의 목록을 앞에 두고 여러 필진들이 모여 첫 회의를 하던 날, 정태수 열사의 업적(?)에는 정말로 이것이 있었다.‘박경석을 물들였다.’내가 여러 열사 중 정태수 열사를 기록해보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박경
▷ 전편 : 사랑의 야반도주 (기록자인 홍은전은 ‘홍’으로 구술자인 김영희는 ‘김’으로 표기했다.) 생활의 전선 홍: 5년 정도 인쇄소와 족발집을 운영하셨다고 들었어요. 정태수 열사는 이십 대 초반부터 운동에 대한 방향이나 의지가 확고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왜 꺾이게 됐어요?김: 꺾였다기보다는 상황이 그렇게 된 거야. 내가 만삭일 때 태수형이 친구 병문안 가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을 했어. 만삭의 몸으로 내가 태수형 병간호를 했어. 내가 애 낳을 때도 깁스를 하고 있었다니까. 그러니 활동을 할 수가 없었던 거지. 전
김영희는 나의 동료이다. 나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활동했고 그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했다. 언젠가 함께 갔던 엠티에서 그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걸 보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정태수라는 사람의 마음을 잠시 상상했다. 1994년 정태수가 보고 홀딱 반해버렸을 그 장면을 나도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날이었던 것 같다. 태수와 영희의 파란만장했던 청춘의 한 자락에 대해 들었던 것이. 정태수 열사에 대해 기록하기로 했을 때 나의 가장 큰 사심은 바로 이
▷ ③부 살아남은 자, 조직하라 - 생활의 전선에서(1997~2001년) 한편 1994년 스물여덟 살의 정태수는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 노래패 ‘노둣돌’에서 활동했던 김영희를 만나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김영희는 대학 노래패에서 노래하며 학생운동을 하던 소아마비 장애 여성이었는데 정태수와 같은 제주 출신이었다. 하지만 정태수의 장애가 중증인 데다 장애인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김영희의 가족은 둘의 교제를 반대하고 나섰다. 김영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갓 취업을 했던 1995년 봄 즈음부터는 제주에 있던 가족이 서울로 쫓아와 그의
▷ ②부 태수가 본 세상 -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와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조직 활동가 시절(1991년~1997년) 19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사회에 민주화의 열망이 들불처럼 번져 갔을 때 장애인운동도 그 영향을 받았다. 장애 문제를 개인이 극복해야 할 것으로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가 구조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아래 장청)는 장애 대중을 조직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청년들의 단체였다. 1991년 결성된 장청은 장애 현안에 대응해 선도적으로 싸우는 와중에, 보다 큰 힘을 발휘하기
▷ ①부 혼자 남은 아이 -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직업훈련과정과 동문회 ‘싹틈’ 시절(1988~1990년) 1988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태수(22세)는 서울 고덕동에 있는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직업훈련 과정에 입학했다. 목공예, 도자기, 수공예, 컴퓨터 등의 과정이 있었는데, 정태수가 택한 것은 전산(컴퓨터)이었다. “나름 엘리트과였죠. 전산과 동기가 8명이어서 우리는 8비트라고 불렸어요. 뇌성마비 장애인 셋, 소아마비가 넷, 그리고 척수장애인 하나. 태수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서 머리가 짧고 양쪽에 목발을 짚고 다녔어요. 다
- 혼자 남은 아이 서울 명일동 어느 카페에서 정태수 열사의 어머니 강영자 님을 만났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는 작은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걸어왔다. 열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 왔다고 말하자 어머니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나를 통과해 먼 곳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지난 것들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누가 물어봐도 대답하기 싫어…”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인터뷰 내내 그 말을 반복하면서 어머니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정태수는 1967년 겨울 제주 모슬포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
비마이너는 2019년 하반기에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기획 연재를 진행하고 있다. (▷ 기획연재 기사 바로가기) 이에 비마이너와 노들장애학궁리소(아래 궁리소)는 21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유리빌딩 4층 들다방에서 차담회를 열고 장애해방열사 기획연재의 기록자들이 연재하며 느꼈던 고민과 당시 장애운동의 현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진행은 김도현 비마이너 발행인이 맡고, 정창조 궁리소 연구활동가, 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그리고 박
▷ ②부 : 나의 싸움 우리는 왜 그를 기억하는가 “한번은 기연이 형이 리프트를 타는 과정에서 역무원이 반말을 했거든요. 그래서 막 싸우고 있는데 기연이 형이 그냥 가시는 거예요. 나는 너무 화가 났는데. 나중에 왜 그냥 가셨냐고 따졌거든요. 근데 싸워서 뭐 하냐고. 너는 싸우면 끝나는 사람이지만 자기는 계속 만나야 될 사람이라고. 나중에 도움받아야 될 때 불편함이 있으니까 아주 심하게 나를 모욕한 게 아니면 그 정도는 괜찮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역무원이 늦게 나오거나 불친절하면 생명에 지장을 주는 거잖아요.” 김광백은 박기연과 함께
▷ ①부 : 유서가 된 죽음 앞과 뒤를 책임진 사람 2002년을 누군가는 월드컵의 해로 기억하겠지만, 인천 장애운동사에서는 본격적인 장애인운동의 물꼬를 튼 해로 기억된다. 그해 5월 서울지하철 5호선 발산역에서는 중증장애인 윤재봉(당시 63세) 씨가 고정형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시 등 관계 당국 어느 곳 하나 책임지고 나서지 않았다. ‘장애인이동권연대’는 8월 12일부터 국가인권위원회 13층 위원장실을 점거하고 장애인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인천장애인교육권연대 김광백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