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봉, 열악한 포천 지역에서 후배 양성하며 묵묵히 활동
쉰 살 넘어 탈시설한 이수미, 지하철 투쟁하며 ‘장애인 권리’ 외쳐

제22회 정태수상 수상자로 이수미·이영봉 활동가가 공동 수상했다. 정태수 열사 22주기 추모제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모습.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제22회 정태수상 수상자로 이수미·이영봉 활동가가 공동 수상했다. 정태수 열사 22주기 추모제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모습.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제22회 정태수상 수상자로 이수미·이영봉 활동가가 공동 수상했다.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는 지난 1일, 장애해방운동가 정태수 열사 22주기 추모제를 열었다. 정태수 열사는 중증지체장애인으로 1980년대 말부터 약 15년 동안 장애인운동에 헌신했다. 열사는 2002년 3월 3일 장애인청년학교 수료식 모꼬지 도중 과로에 의한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태수상 심사위원회는 이수미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이영봉 포천나눔의집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포천나눔의집센터) 소장을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 심사위원회는 “올해 후보자들 중 온갖 탄압과 비난 속에서도 현장투쟁을 성실히 지켜온 이수미 활동가와 경기 북부 지역에서 묵묵히 활동해 온 이영봉 소장을 공동수상자로 선정했다”라면서 “화려하게 빛나는 위치가 아니더라도 묵묵히 현장을 지켜내고 후배 활동가를 양성하는 모습 속에 정태수 열사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했다”라고 강조했다.

- 이영봉, 열악한 경기 북부에서 후배 양성하며 묵묵히 활동

수상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영봉(57세) 포천나눔의집센터 소장은 대뜸 “미안하죠”라고 답했다. 매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을 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지금 다들 아침마다 고생하잖아요. 제가 있는 지역은 경기도 외곽이다 보니 (매일 아침마다 가기가 힘들어) 제가 받아도 되나… 하는 마음이 우선 앞서요.”

이영봉 포천나눔의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이영봉 포천나눔의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이 소장이 장애인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도 비슷한 마음 때문이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 고등학교 때 ‘정립회관’에서 연을 맺은 친구들의 활동 덕에 ‘내가 혜택받으며 살고 있었구나’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어 2005년경 경기도 양주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포천으로 넘어온 것은 2016년쯤이다.

그는 2017년 포천나눔의집센터 소장을 맡으며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소장은 경기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며 저상버스 확대 및 노선 확대, 지역 정책토론회 개최, 포천시 장애인 자립생활 권리보장 선언문 발표 등에 기여해 왔다.

경기도 북부 외곽에 있는 포천시는 열악하고 장애인 접근이 썩 좋지 않다. 그러한 곳에 있는 포천나눔의집센터에 하루 60~70여 명이 왔다 갔다 한다. 포천시 인구 14만 3,000여 명 중 등록장애인이 1만 명인 것을 고려하면 꽤 큰 규모이다.

이 소장은 활동의 가장 힘든 점으로 ‘장애인 당사자를 변화시키는 것’을 꼽았다. “워낙 보수적인 동네예요. 공무원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장애인분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요. ‘시가 돈이 없다는 데 왜 장애인콜택시를 만들어 달라고 하냐’면서. 관의 변화, 사회적 변화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부딪혀서 변화를 만들면 되는데, 당사자분들 변화시키는 게 가장 힘들더라고요. 저 혼자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도 숙제죠.”

‘활동의 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그는 “당사자의 변화”라고 답했다. “초창기엔 모든 문제를 센터에 와서 하소연했다면 이젠 본인 장콜(장애인콜택시)이 늦어지면 직접 전화해서 권리를 이야기하세요. 가장 힘든 부분이 변화될 때 가장 기쁨이 크죠.”

이 소장은 매년 도보 행진 ‘두 바퀴로 가는 세상’을 진행하며 장애 인식 개선에 힘써왔다. 특히 2018년부터는 장애인운동 활동가 모임을 꾸려 후배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이 모임에서는 장애인제도에 대해 토론하며 포천시에 요구할 장애인정책을 같이 만들기도 한다. 모임참여자는 평균 15명이다. 그가 앞으로 더욱 힘쓰고 싶은 것도 후배 양성이다. “우리 센터가 갖고 온 이념과 가치를 지키면서 활동할 소장을 키우고 싶어요.”

- 예순 넘은 이수미 “늦게서야 꽃을 피우는 것 같아요”

이수미(63세) 활동가는 집에서 31년을, 장애인거주시설에서 15년을 살았다. 2017년 탈시설해서 2019년부터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시작한 이 활동가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권익옹호 활동을 시작으로 동료상담가,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개인 대의원 등으로 활동해 왔다. 특히 장애인권리예산 확보 투쟁,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복직 투쟁,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 등에 성실히 참여하며 현장 투쟁에 앞장서 왔다.

노들야학 학생회장단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이수미 씨가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지난해 8월, 노들장애인야학 30주년 개교기념제에서 이수미 활동가가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그는 집에서 살 때도 자유롭게 외출하진 못했다고 한다. 계단이 있는 3층 집이라 동생들이 이 씨를 엎고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눈치 보며 살아온 것 같아요. 그때는 참고 지냈던 거지 ‘차별’이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러다가 이 씨가 살고 있던 장애인거주시설(개인시설)이 폐쇄됐다. 집도, 시설도 싫었지만 자립할 방법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은평구에 있는 단기보호센터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1년쯤 생활하며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알게 됐다. 2017년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에 들어가면서 이 씨의 자립생활이 시작됐다.

이 씨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공부하면서 세상을 새롭게 배웠다. “노들야학이 작년에 30주년이라고 하던데 저는 이런 세계를 전혀 접하지 못했어요. 노들에서 공부하며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내 생이 ‘차별 받아온 생’이라는 걸.”

지하철 투쟁이 뜨겁던 재작년,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이 씨에게 말했다. “박경석 대표님이 출근길 선전전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와달래요. 약속했으니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가야 했죠. 그런데 시민들 의식이나 경찰, 서울교통공사, 오세훈 서울시장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변하는 걸 느꼈어요. 정치인들은 인간다운 삶을 따지기보다 정치적인 걸 먼저 생각하니 분노가 일잖아요. 시민들도 장애인에 대해 정말 모르는 것 같아요. 그렇게 투쟁하게 됐어요.”

일주일에 두세 번, 어떤 날은 네 번씩 나와 꾸준히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의 한 자리를 지키던 그는 이제 지하철 투쟁 현장을 든든하게 지키는 활동가가 됐다. 이 활동가는 “늦게서야 꽃을 피우는 것 같다.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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